8번 채혈하기
다년간의 병원 생활을 했으면서도 아직도 난 내 팔이나 손등에 주삿바늘이 꽂히는 순간을 보지 못한다. 고개를 휙 돌리고 주삿바늘이 살을 뚫을 때의 고통이 무서워 허벅지를 꼬집어서 손톱자국을 내곤한다. 오늘은 후군의 성조숙증 피검사 당일이다. 학교를 조퇴하고 예약시간에 늦지 않게 일찌감치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도 긴장했는지 가는 내내 입을 쉬지 않는다. 피를 뽑아서 어디로 가져가냐? 몇 통 뽑냐? 난 잘못이 없는데 왜 피를 뽑냐? 운전하는데 방해돼서 나중에는 그냥 잤으면 싶었다.
성조숙증 검사는 시간차를 두고 다섯 통의 피를 뽑아 수치 비교를 하기 때문에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다. 제발 한 번에 혈관을 잡기를 바랐건만... 공포의 혈관 훑기 당첨이다. 아이가 긴장도 했고 에어컨 바람이 추워서 그런지 혈관이 숨어서 좀처럼 나타나질 않는다. 간호사선생님께서 이리저리 두들기고 고무줄을 꼈다 뺐다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마음에 드는 혈관을 찾지 못하신다.
"한 번 해봅시다. 오른쪽 팔 주세요. 아... 어떻게 아프죠? 미안해요." 야속하게 피가 전혀 나오지를 않는다. 제발... 제발.... 보고 있는 내가 다 초조하다.
"미안해요. 왼쪽에서 한 번 찾아볼게요. 아이고 아플 텐데 너무너무 미안해요." 이번에도 전혀 피가 나오지를 않는다. 양쪽 팔뚝 다 한 번씩 찔렀는데도 안 나오니 긴장도가 더 올라간다.
"아 이런 어쩌지. 여기는 좀 아픈데 어쩔 수 없이 손등으로 해봅시다." 손등 정말 아픈데... 속으로 눈물이 난다. 아이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오른쪽 손등, 왼쪽 손등 모두 실패다. 그 사이 아이 양쪽 손과 팔에 바늘구멍이 여러 개 생겨버렸다. 혈관이 자꾸만 숨어 다녀서 주삿바늘을 푹 찌른 후 숨은 혈관에 찌르려고 주삿바늘을 찌른 채로 좌우로 훑어가며 4번이나 실패했으니 아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물 좀 마시고 조금 쉬다가 다시 오라고 잠시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다시 이름이 호명되고 이번에는 다른 간호사선생님이 시도해 보셨다.
"이쪽은 아까 실패한 곳이고 여기 하나가 있는데 혈관이 너무 얇아요. 아플 텐데 너무 잘 참네요."
"오늘 우리 후 듬직하네. 잘 참는다." 아무 말 없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후로 2번이나 더 실패했다. 더 이상 안 되겠는지 경력자 간호사님을 호출하셨다. 이제는 성공하겠지? 긴장하며 바늘을 이리저리 훑더니 이번에도 역시 실패다. 너무 속이 상하고 보는 내가 다 땀이 나서 에어컨 바람이 덥게 느껴졌다.
아이는 7번이나 주삿바늘을 견디며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팔에 꽂히는 주삿바늘을 응시하기까지 하며 연신 미안해하는 간호사 누나들에게 참아보겠다고 듬직하게 이야기까지 했다. 아이가 달라 보였다. 집에서 애기 짓하고 징징대는 모습과 180도 다른 모습에 놀랐다. 8번의 숙고 끝에 겨우 혈관에서 피를 뽑을 수 있었다. 왼쪽팔에 겨우 찾은 혈관에 주삿바늘을 심고 주사실 뒤쪽 배드를 내주셨다. 안정을 취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누워서 다음 피검사 시간까지 기다렸다.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어른도 아플 부위인데 아이가 어쩜 이리 듬직하냐고 오며 가며 이야기해 주시고 30여 분간 여러분이 돌아가며 진땀 흘리셨는데도 한결같이 미안해하시며 긴장하지 말라고 팔도 주물러주고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이럴 경우 당사자보다 부모님이 화내시는데 어머님 죄송하다고 하시며 퇴장하시는 경력자 간호사 선생님까지도 감사했다.
다행히 검사도중 혈관이 막히지 않았고 다섯 번의 채혈을 완료한 후 수고하신 간호사선생님들께 아이와 아이스커피를 사다 드렸다.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우는 아이도 많고 신생아까지 들락거리며 북새통인 그곳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커피를 받으시며 저희가 죄송해야 하는 상황인데 오히려 커피까지 주시고 너무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좋아하셨다. '뭐가 죄송한가요...선생님 혈관 찾느라 너무 애쓰신거 아이도 알고 저도 느꼈답니다.' 라고 생각하며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후군이 본인이 생각해도 피 뽑으며 느낀 게 많았나 보다.
"엄마 나 피 한번 뽑으니까 또 뽑고 싶어."
"야 임마. 엄마가 다 긴장해서 다리 후들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더니 뜬금없이
"엄마는 착한 사람이야?"
"아니. 갑자기 왜? 엄마는 보통 사람이지."
"주변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는 게 좋아서."
이 녀석 힘들게 피 뽑고 와서 마무리가 자기가 생각해도 좋았나 보다.
"그럼 잘 대해 줘야지. 다 귀한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오늘 너무 고생하시며 친절히 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더라고."
"응 맞아. 나 의사 되고 싶다. 이비인후과 의사돼서 내 코가 막힐 때 스스로 뻥 뚫고 싶다. 키키키"
너 기분 좋았구나. 다행이다. 채혈하는 동안 보는 나도 다리가 후들렸는데 당하는 너는 얼마나 힘들었니. 트라우마 생길까 걱정했는데 아이가 부쩍 큰 게 느껴졌다.
우리 아들 듬직하네 싸나이네. 이런 생각하며 집에 오는데...
"엄마 나 오늘 학원 가면 쓰러질 거 같아 학원 안 갈래."
이런. 동전의 양면 같은 놈. 네가 그렇지.어째 잘 나간다 했어.
"왜 조금 늦을 뿐인데 지금 가면 괜찮아."
"엄마 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봤잖아. 나 어지럽고.. 나 바늘 여러 군데 찔러서 지금 어쩌고저쩌고..."
아... 인간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댔지. 그래. 이래야 너지.
"그냥 가. 왜 또 칭얼대. 아깐 멋진척하더니. 아까도 아야아야 아파요 이러지 왜 지금 이러냐고."
"엄마랑 이야기하면 기분 나빠. 암튼 나 오늘 못가 나 가서 좀 누워있어야 되. 피를 5통 뽑고 지금 어지러워."
이유가 참... 가지가지. 배드에서 누워서 1시간 반 채혈 검사 한 저분은 쌩쌩해서 날아다니는데 그 옆에서 보초 서며 지켜봤던 내가 긴장 풀리자 집에 오자마자 누워버렸다. 학원까지 가며 마무리하는 해피앤딩이면 좋았을 텐데... 뭐가 항상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