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 3 - 여유
내일 멜버른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늘이 허락한 만큼, 시내를 오래도록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가든의 도시’라 불리는 멜버른을 상징하는 곳, 로열 보타닉 가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료 트램 존을 벗어나야 하는 길이었지만, 굳이 교통카드를 새로 살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걸어서 다가가 보는 것도 여행의 한 풍경일 테니.
호텔 앞 작은 마트에 들러 미리 점심 도시락을 챙겼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며칠 전 저녁 무렵과는 메뉴도, 가격도 달라져 있었다.
첫날 저녁, 5.9불짜리 일본식 김밥을 보았던 기억이 스쳤다. 아마 마감 세일이었던 듯하다. 오늘은 유부초밥 도시락 9불, 작은 병 커피 3불을 집어 들었다. 어제의 점심 피자가 27불, 저녁 햄버거가 30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도시락이 훨씬 간단하고도 마음 편한 선택 같았다. 한 도시에서의 식사 풍경은 곧 그곳의 시간과 물가, 나의 일상 감각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다섯 블록쯤 걸었을까. 오래된 영국식 건물이 나타나고, 광장 한편에는 낯선 조형물이 서 있었다. 호주 철도청의 흔적일까. 초창기 증기기관차가 거꾸로 세워져 있었는데, 웅장했던 시절을 벗어나 이제는 하나의 기념비, 사라진 시간의 잔해처럼 보였다. 과거의 영광은 늘 그렇게 박제되어 남아,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는 묵묵한 풍경이 된다.
오라강 변에 이르자, 바람결이 달라졌다. 강물은 오늘도 느릿하게 흐르고, 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고요히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그 물결 속에서 내 여행의 시간 또한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걷는다는 것은 결국, 도시의 역사와 나의 호흡을 겹쳐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야라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강의 반의 반도 되지 않을 작은 강이지만, 양쪽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줄기의 폭은 좁아도, 그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은 듯 보였다.
강변 철로 아래쪽, 빛이 닿지 않는 음산한 공간에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어둠을 가리고자 한 색채가 오히려 그곳을 또 하나의 작은 갤러리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반대로 햇빛이 드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며 쉬고 있었다. 그늘과 빛이 교차하는 강변은, 삶이 지닌 명암의 비유처럼 다가왔다.
수상 카페에는 토요일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마치 크루즈처럼 꾸며진 공간에는 수영장까지 있어, 강 위에서도 휴일의 활기가 넘쳐났다. 강가의 풍경은 단순히 물 위에 비친 건물의 그림자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웃음과 발자취로 채워지고 있었다.
현대식 최첨단 빌딩이 강을 감싸 안고 서 있는 사이로, 개성적인 그림이 그려진 트램이 지나갔다. 강물 위에는 카누와 보트가 부지런히 오가고, 제법 큰 수상택시도 유유히 흘러갔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도시란 결국, 물처럼 흐르는 수많은 삶이 모여 잠시 머무는 그릇일지도 모른다고. 강은 한없이 흘러가지만, 사람들의 오늘은 그 위에서 반짝이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복고풍의 다리를 건너자, 눈앞에 현대적인 음악관과 국립 미술관이 나란히 펼쳐졌다. 시간의 결이 다른 두 건물이 서로를 마주하며, 이 도시가 지닌 과거와 현재를 함께 증언하는 듯했다. 길가의 나무에는 알록달록한 장식이 요란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일본 예술가 쿠사마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입구 중앙 전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특별 전시는 이미 사전 매진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멈추자, 제주 본태 박물관에서 보았던 익숙한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빛과 붉은빛이 어지럽게 번지는 호박, 은빛으로 번쩍이는 구체들, 또 그 속을 거니는 듯한 의상까지. 반복과 집착이 만들어낸 그녀의 세계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호주인들, 그리고 관광 온 중국인들이 앞다투어 기념품을 고르고 있었다. 에코백 하나가 40불에 달하는 가격이었지만, 긴 줄을 서서까지 그것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에게는 조금 과한 가격처럼 보였지만, 이들에게는 일상에 흘려 넣고 싶은 하나의 상징이자, 예술이 주는 유혹이자 자극일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예술은 단지 전시장의 작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기념품 속에서도, 길가의 장식 속에서도, 이미 도시의 공기와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예술은 결국 삶과 동떨어진 고상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끊임없이 증식하고 이어지는 어떤 리듬일지 모른다.
야외 미술관의 나무 정원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도시락을 펼쳤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은은했고, 바람은 적당히 서늘했다.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식 김밥을 들고 있었다. 이곳이 호주라는 사실이 잠시 낯설게 느껴질 만큼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곧,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음식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이 도시의 자유로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온통 공원이라 로열 보타닉 가든 스퀘어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발길을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공원 입구에서 살사 춤 축제가 한창이었다. 경쾌한 음악이 공기를 흔들고, 푸드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가 길손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생생한 현장이었다.
나는 바닥에 앉아 구경하다가 결국 사람들의 열기에 휩쓸려 함께 춤을 추고 말았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짝을 맞추어 열정적으로 몸을 흔드는 모습은 낯설고도 경이로웠다. 그들의 즐거움은 순간의 춤을 넘어 삶의 태도처럼 보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도 꼭 춤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로열 보타닉 가든 스퀘어에 닿았다.
일부러 드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가 보았다. 그림 속에서만 보던 낯선 꽃들이 사방에 피어 있었고, 열대 기후 덕분인지 그 크기와 색감, 규모가 한국에서 보던 식물들과는 전혀 달랐다. 꽃잎은 더 크고, 색은 더 강렬하며, 줄기는 더 당당했다.
‘아름답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은 짧았지만, 마음속 울림은 깊었다. 부러움과 감탄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부러움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마주하는 순간에만 얻을 수 있는 설렘을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행이란 어쩌면, 그 설렘을 찾아 스스로를 낯선 자리로 옮겨놓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사람,
윗옷을 벗고 낮잠에 빠진 사람,
가족과 함께 운동을 즐기는 이들,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그리고 나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셔터를 누르는 여행자들.
멜버른의 여름 한낮 햇살은 뜨겁지만, 정원 중앙의 연못가에는 멋스러운 중절모에 나비넥타이를 맨 뱃사공이 서 있었다. 그는 작은 나무배에 손님을 태우며 환하게 웃었고, 연인들은 그 웃음에 화답하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뱃사공은 일본풍의 하얀 양산을 건네주며 그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아주었다. 사랑이 가득한 두 사람의 얼굴은 연못 건너편에서도 환히 빛나 보였다.
멀리 연초록 잔디밭에서는 야외 결혼식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는 정장을 차려입고, 지인들의 환호 속에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음악이 흐르고, 박수와 춤이 이어졌다. 젊은 용기와 축하의 기운이 잔디밭을 가득 채웠다.
오라강변을 다시 걸었다. 바다 쪽 하늘에는 점점 먹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여전히 일출 크루즈 매표소가 서 있었고,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이미 매진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사람들의 마음마저 서둘러 채워가는 듯했다.
가는 빗줄기 속에서도 길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양의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파라솔 그늘로 다가가 그의 그림을 살펴보다가, 결국 나를 기억하기로 했다.
호주 이민 2세인 한국 학생이 그린 20불짜리 그림 한 장. 값으로는 크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오늘 하루 이 도시에서 내가 마주한 햇살과 바람, 그리고 우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설의 한 장면처럼, 영화 속 한 순간처럼—'
그림이 완성되어 가자 눈부신 햇살과 환한 웃음이 겹쳐지며 하루가 흘러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여섯 시. 태양은 여전히 정수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 듯했다. 세월처럼, 내 인생처럼.
나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내 삶을 뻔한 결말로부터 벗어나게 한 용기와 선택, 그리고 지금의 나를 세워준 여행과 글쓰기.”
그 말이 내 안에서 한동안 울리다가, 이내 짧고 간절한 속삭임으로 가라앉았다
― 지구라는 별에 소풍 같은 인생,
멜버른.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