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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림 Oct 18. 2024

꿈 환상 때로는 착각

나에게 꿈이라는 건...

1992년 상황을 설명하자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밤죄 소탕 작전 ‘범죄와의 전쟁’ 성공 이후, 김영삼후보가 이어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속어로는 ‘김영삼의 180일’ 즉, 노태우 정권과 비슷한 범죄 소탕 작전을 실행했었다.


우리가 잡혀 들어간 시기가 바로 그 180일 기간이었다. 나라에선 중범죄자를 소탕하라는 지시였는데 경찰서와 구치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배우 하정우 주연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올법한 범죄자나 깡패, 건달들이 아니다.


배고파 라면 한 봉지를 가게에서 훔친 아이, 길가에 있던 쌀집 오토바이 자전거(전동기 장치 자전거)를 훔친 아이, 교회에서 헌금을 하는 척하다가 헌금함에서 헌금을 훔친 아이 등 등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꽤나 잡혀 들어와 있다.


우리는 재판을 통해 초범이고 학생인 점을 감안하여 집행유예가 아닌 보호 관찰소로 이송이 결정이 났다. 그렇게 재소자로 2개월여의 시간을 보내고 사회에 나오게 되었지만 학교에선 우리를 퇴학처리했다. 난 고등학교 중퇴자, 정확히는 중학교 졸업이라는 최종 학벌이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이런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던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지방으로 이사를 오셨다. 기존 서울에 있던 친구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리시곤 나에게 기술을 배우라 권하셨다. 나는 직업 훈련원에 들어갔다. 직훈은 아침 점호부터 시작해 심지어 기숙사에는 악명 높은 사감 선생님이 있어 외출도 쉽지 않았다. 얼마 전 다녀온 감옥과 거의 다를 봐가 없었다. 1년의 시간이 지나 용접 자격증을 취득했고 공장 잡부로 취업했다.


1994년, 내 인생의 낙이라곤 술 마시고 담배 태우는 게 전부였다. 매일매일을 몽롱한 정신으로 희망 없던 삶을 살아가던 그때, 공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대학가요제 참가자 모집’ 


이란 TV 광고를 보게 되었다. 광고를 보다 보니 옛 생각이 떠오르며 거짓말처럼 잊고 있던 꿈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용접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용접봉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내 마음이 불타 올랐다. 그리곤 결심했다.


“대학에 가자. 대학가요제에 나가자.”


하지만 내 최종학력은 중졸이었다. 먼저 고교 졸업증을 따야 했다. 공장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치르고 수능시험까지 봐야 했다. 쉽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른 동년배 친구들보단 1년 늦게 대학에 입학, 꿈을 위한 첫 단추를 끼웠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학교의 ROCK 밴드 동아리를 찾아갔다. 동아리 선배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운 좋게도 단박에 보컬 자리에 들어갔다.


이후 가수가 되기 위해 다수의 음반 기획사 오디션을 치렀다. 고군분투했지만 될 듯 말 듯 본선 무대만 오르내렸지만 가수로 데뷔하지는 못했다. 결국 스쿨 밴드 멤버들과도 불화를 일으켰고 동아리에서 마저 강제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1995년 10월 눈 내리던 어느 날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나는 군대에 가야만 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꿈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어찌 보면 내 욕심이 만들어낸 착각이었고 허상이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이 되었다.


운전병으로 군입대했다. 우리 수송부는 운전병인지 정비병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비를 많이 했다. 그만큼 월남전에 다녀온 차량도 많았고, 그런 차들이 퍼지지 않고 정상 운행이 되는 이유에는 바로 우리 같은 운전병들의 정비 덕분이었다. 만약 운행 중 사고가 나거나 정비 불량으로 차가 퍼지면, 모두 운전병 책임이었다. 돈으로 물어주는 것은 당연했고, 정신 교육으로 6공 타이어를 메고 연병장을 돌아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내 손은 항상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추운 겨울철에는 이 기름때로 인해 손가락 끝이 갈라져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오전 수송부 차량 정비시간, 내가 할당받은 트럭의 타이어를 교체하다가 내 손가락이 휠에 끼어 손가락이 골절되는 사건이 있었다. 군 의무실에선 치료가 불가했고 의무관은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국군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켜줬다.


손가락에 깁스를 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약기운 때문인지 피곤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까지 구보를 하면서 가는데, 갑자기 내 목소리가 작다며 내무반 선임이 욕설을 퍼부었다. 분이 안 풀렸는지 나를 발로 차기까지 했다.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는데도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복수심까지 차올랐다.


식사를 끝내고 내무반 검열시간, 중대장님이 일 이등병을 모아서 소원 수리(군 내부 문제를 고발)를 직접 받아갔다. 그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90년대 군 특성상 군생활을 편하게 하려면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선임들에게 교육까지 받았지만 나는 그날 깁스 중 선임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한 복수심에 불타서 수송부의 문제점과 내가 다쳤는데도 때렸다는 말을 소원수리에 적어 냈다.


얼마 후 중대장이 나를 단독 호출했다. 중대장실에 가니 내가 적은 쪽지를 보면서 그는 자상한 얼굴로 내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서 너를 때린 놈이 누구냐?

걱정하지 말고 말해, 절대 비밀 보장할 테니깐”


난 그날 이후로 선임을 고자질한 배신자로 낙인찍혀서 힘든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 압권인 것은 그 중대장은 항시 무슨 소원수리 사건이나 중대 내 구타 사건이 발생하면 부대원들이 모두 집합시킨 자리에서 내 이름을 호명하면서


이 사건은 누가 그런 거냐?”


꼭 나를 밀고자처럼 대했다. 중대장도 자신의 실적을 위해 경찰서에서 나를 구타하던 경찰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다른 부대로 전출 가기 전까지 내 군생활은 꼬이고 꼬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를 때렸던 상병도 병장이 되어 수송부의 최고 반장이 되어 나를 갈구고 또 갈궜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란 기도를 하는 게 전부였다.


힘든 일등병의 시간을 보내던 중 특수직으로 사제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 부대에 사람 한 명이 필요하다는 공문이 수송부로 내려왔다. 정말 다들 가고 싶어 하는 파견 자리였지만 대형 트럭을 운전할 수 있는 계급도 상병급에서나 파견 나가야 하는 자리였다. 일등병인 나는 꿈도 꾸지 못할 자리였다.


부대 수송관은 경상도 사람으로 유독 전라도 출신을 싫어했다. 지역감정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정말 이유 없이 싫어해도 너무 싫어했다. 나는 부대에서 유일한 전라도 출신이었다. 물론 내 아버지 호적 때문에 실제론 서울태생이었지만 본적이 전라도였다. 거기다 최근 중대장에게 자신의 왕국인 수송부의 폭력 사건을 밀고까지 해서 수송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나였다. 그렇게 수송관의 눈에 가시 같던 나는 과거 전례를 깨고 특수 운전직 파견을 가게 되었다. 사실 소원수리와 같은 사건이 없었다면 내가 갈 수 없는 자리였다.




- 제목은 밴드 EOS 1집에서 착안했고 표지는 전시공(전상일 시각 공잔단)의 작품이며 부제는 신성우 1집에서 착안했습니다.


- 수송관?

군대의 수송부에서 수송에 관한 기술 및 행정 사항을 맡아보는 장교나 하사관(준위) 또는 그 직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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