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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림 Oct 18. 2024

The Dreamer

첫 수능과 록스타의 꿈

1992년, 고등학교 2학년. 우리는 첫 수능 세대다. 난 운 좋게도 수능 모의고사에서 2등을 했고, 담임 선생님은 내게 큰 기대감을 가지셨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오직 뮤지션, 록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버지는 평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야당을 후원했다는 괘씸죄로 제5공화국의 압박을 받던 아버지의 회사는 운영 자금 줄이 막히면서 결국, 평직원 2000명이 근무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게 되었다. 잘 나가던 아버지는 도망자 아닌 도망자 신세가 되셨고,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


'엄친아’로 불리며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이었지만 갑작스러운 가계의 경제적 몰락은 우리 가족 모두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내게 늦은 밤마다 홀로 집에 있는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듣던 라디오 디스크자키의 목소리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도피처였다. 그렇게 내 꿈은 자연스럽게 라디오 DJ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라디오 DJ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명 가수가 되어 라디오 PD에게 발탁되어야만 했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 인가?


거기다 대학생이 가수가 되려면 대학가요제, 일반인은 강변가요제에 나가야 했다. 그러니 고등학생이 가수가 되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 듯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를 켜니 SBS라는 방송국이 신규 개국하면서 신인 가수를 등용하는 가요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광고에 나온다.


"이번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라며 한 유명 여성 가수가 홍보했고 나이나 학벌 제한이 없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혁신적인 오디션이었다. 분명, 이 대회는 나를 위한 기회라는 생각에 바로 방송국에 가서 원서를 받아 대회에 출전할 밴드를 꾸렸다. 마땅한 장비가 없어서 멜로디온으로 작곡을 하고, 교회 누나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늦은 밤까지 교회에서 합주 연습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대회 당일, 나는 학교에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무단으로 학교 담장을 넘었다.


“선생님, 인생의 첫 번째 기회가 온 듯합니다. 꼭 합격하고 오겠습니다.”


우리 밴드는 색소폰, 드럼, 키보드, 여성 보컬, 그리고 메인 보컬로 이루어진 변칙적인 팀이었다. 사실은 기타리스트를 구할 수 없어서 2% 부족한 팀이었다. 1차 오디션 시간이 다가오자 방송국으로 팀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럼 파트를 맡은 친구가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어 오디션장에 입장했고 우리는 드럼 파트 없이 밋밋하게 노래를 해야만 했다.


심사결과 우리 밴드는 탈락이었다.


가요제는 첫 개최라서 그런지 실력파 뮤지션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 참가자들을 지켜보니 우리는 그들에 비해 가창력도 팀의 합주 실력도 한 참 떨어진 어찌 보면 1차 탈락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작사 작곡 경험이 전무한 내가 서류 심사를 통과한 것 하나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가요제 탈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교생 신분으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거듭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거리를 활보했다.


사건이 있던 날도 친구와 단 둘이 술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발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난생처음으로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실렸다. 경찰서에 도착해 밤새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경찰들이 우리에게 수갑을 다시 채우고 해장국집에 가서 밥을 먹였다. 굴욕적이었지만 염치도 없이 난생처음 먹어보는 선지 해장국이 너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니 경찰은 우리에게 담배까지 태우게 해 줬다. 그리곤 담배를 다 태웠으면 따라오라며 나와 친구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경찰서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으슥한 곳에 방 하나가 있었고 문을 열자 그곳에는 덩치 큰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말한다.


“야! 이곳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강력반이야.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 친구들 중에 나쁜 짓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놈들이 있으면 여기에 모두 적어!”


그들은 A4용지와 모나미 볼펜을 내게 던졌다. 내 잘못을 모두 적으라면 이해가 되는데 뜬금없이 남의 잘못을 적으라고 했다. 그 말을 이해 못 해 어리바리한 나를 보며 경찰봉을 쫙 펴더니 책상에 내리쳤다. 순간 날카롭고 둔탁한 ‘쫙!’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며 두려움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이후 나와 친구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가해지는 둔기에 의한 폭력에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들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호통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눈떠 이 새끼야! 어디서 엄살이야!


눈이 떠진 나는 볼펜을 잡고 친구들을 팔기 시작했다. 거짓으로 한 페이지를 다 작성했다. 경찰들이 부모님을 불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경찰들에게 듣고선 부모님은 우리가 중죄를 지었다 판단,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국선이 아닌 300만 원을 가량을 지불하고 변호사를 선임하셨다.


“걱정 마세요. 이 녀석들 기소유예로 나올 겁니다.” 


변호사는 며칠 안에 아이들을 빼주겠노라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재판을 받기 위해 서울 구치소로 이관되었다. 경찰은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 부모님을 경찰서로 불렀다.


“경찰서에서 아이들을 잘 먹이고 인격적으로 대해 줬지만 녀석들의 범죄의 무게가 너무 커서 구치소로 이관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재산 피해를 준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경찰들은 강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거짓 진술서를 작성하게 만들었고 겨우 만 16세의 청소년인 우리를 중범죄자로 만들었다. 자신들의 실적을 만들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한 어른들의 양심불량한 모습은 당시 대한민국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 글의 제목은 N.EX.T 2집 에서 착안했고 표지는 전시공(전상일 시각 공작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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