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첫 번째 충동은 항상 옳다. (중략) 따라서 초기 교육은 전적으로 소극적이어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덕이나 진리를 가르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악덕으로부터 정신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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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글은 루소의 <에밀>에 나온다. 내가 과거에 이 문장을 읽었다면 전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비고츠키 관련 책 두권을 읽었다. 그 탓에 동의하는 부분과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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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는 부분은 '자연의 충동은 옳다'는 주장과, '교육의 목적은 덕이나 진리가 아니라 정신의 오류를 보호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그래서 초기 교육은 '전적'으로 '소극'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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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의 주요 개념 중 하나가 '근접발달영역'이다. 이 개념은 다소 어렵지만 요점은 단순하다. 아동의 발달 정도를 성인이 이끌어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비고츠키과 그의 제자들은 이미 실험적으로 이를 증명했으며, 현재 교육 심리학도 비고츠키의 주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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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성인이 아동의 덕이나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성인은 아동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지 않고 그냥 놔두기만 할 경우, 즉 '전적으로 소극적'인 경우 아이의 언어발달은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 하기 때문에 언어발달이 더디면 '마음을 악덕으로부터, 정신을 오류로부터 보호하는데' 문제가 생길 여지가 생긴다. 비고츠키는 이 문제를 <생각과 말>에서 깊게 사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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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방하는 동물이다. 때문에 교육은 아주 중요하며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루소의 우려처럼 그 교육이 덕이나 진리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억압적이라면 그것을 과연 교육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통제가 아닐까.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은 비판정신이 없기 때문에 정신의 오류를 통제하지 못한다. 때문에 악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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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장을 아르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에서 읽고 인용했다. 그는 카시러의 글을 빌려, 루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이자 '극단적인 전체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이런 관점은 방금 덮은 책, <자존감이라는 독>을 다시 환기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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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류샹핑은 자존감을 분석하면서 안정애착과 불안정 애착을 구분한다. 불안정 애착은 자존감이 낮은 상태를 말한다. 불안정 애착은 다시 저항과 회피로 구분된다. 불안정+저항 애착은 엄마와 떨어질때 무척 두려워하는 경우이고, 불안정+회피 애착은 자기 안에 숨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상당히 높은 자존감을 보이는데, 너무 자존감이 높아서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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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때론 고독의 철학자로 불린다. 나는 그가 어쩌면 불안정+회피 애착을 가진 천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의 교육론에도 이런 태도가 묻어난다. 실제로 그는 자식들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뛰어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아버지의 교육관점 때문에 훌륭한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나는 그 점이 너무 아쉽다. 만약 루소가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을 알았더라면, 아니 어릴적 엄마와의 애착이 건강하게 만들어졌다면 그의 자녀 교육은 어땠을까? 어쩌면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훔볼트 형제의 어머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