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 이 말은 서로 상반되는 의견이 모두 옳을때 사용한다. 이율배반은 삶의 오랜 난제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가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보면, 주인공 안티고네는 폴리스를 배신한 오빠 때문에 고민한다. "배신자인가 오빠인가" 결국 그녀는 오빠를 선택하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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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이율배반적 상황이 '악의 평범성'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만든 개념이다. 그녀는 악마와 같은 나치의 모습에서 평범한 인간을 발견했는데, 이를 통해 악(惡)의 문제를 통찰하게 된다. 근본에 있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며, 그 선이 실천되는 과정에서 악이 드러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비극을 낳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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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홀로코스트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평범한 삶에서도 비극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최근 평창올림픽과 남북문제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남북문제를 풀어갈 단초로 '단일팀' 구성을 추진하고 있고, 단일팀의 대상이된 여자 아이스하키팀 선수들은 자신들이 희생을 억울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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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팀 구성은 남북 정부로서는 성과다. 또한 이를 계기로 잠시나마 남북통일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적 성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대회를 위해 피땀흘린 선수들의 노력을 희생시킨다. 대의라는 명분으로 강요한다. 그럼 선수들의 영달은 소의인가? 만약 국민의 노력이 아니 인간의 노력이 이런 식으로 희생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권유린아닌가? 즉 남북관계보다 더 큰 대의가 희생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 남북관계가 틀어지면 한반도의 긴장관계가 고조되고, 결국 정치경제적 위기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한국 국민만이 아니라 동북아 아니 전세계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단일팀이 더 대의일수도 있다. 헐 이런 논리는 20세기 민중과 국민을 희생시킨 권력의 전형적인 논리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치가 세계통일이라는 명분으로 한 극악무도한 짓과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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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전형적인 이율배반적 상황이다. 물론 남북 단일팀 문제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이기보다는 삶의 노력과 성과라는 비교적 평범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평범성이 도피처가 될 수는 없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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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를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즉 사유할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 편을 가르고 이편저편에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기 보다는 서로의 감정을 존중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누군가는 "너는 너무 순진하고 나이브하다"며 비난 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이율배반적 상황을 인식한 이상, 누구 편도 들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가령 한국전쟁에서 월북한 자식과 남쪽에 남은 아버지가 전투에서 만났을때 중간에 있는 엄마이자 아내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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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려되는 점은 이런 사유를 몇가지 통계나 근거를 가지고 상황과 결과를 단정하고, 고집하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논쟁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야말로 어리석은 접근이다. 이미 학문적으로 그런 태도는 경계되고 있다. 나는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를 보면서 그것을 느꼈다. 이 책은 인생의 책 중 하나로 부동산에 의해 굴절되는 한국사회를 통찰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통계자료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나는 살다살다 이렇게 많은 통계로 예리한 통찰을 하는 책은 처음 보았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은 부동산 계급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일종의 경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면 그의 통찰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이상적 결과 예측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측이 틀렸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단한 통계도 예측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알량한 몇개의 통계나 사실적 근거를 경계해야 한다는 논리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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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통계나 사실적 근거만이 아니라 건강한 해석 의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손낙구처럼 둘 모두를 가져도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맞고 틀리고가 아니다. 그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상황을 단정짓고 섣부르게 행동하기 보다는 끝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행보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을 줄이고, 선의 의지를 실천해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