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러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경 Feb 01. 2018

적폐청산과 근대화

적폐청산이 한창인 요즘은 근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난 200년의 세계적 흐름을 요약하면, 근대화-산업화-민주화-세계화라는 생각이다. 대표적 근대화는 프랑스 대혁명이고, 대표적 산업화는 영국의 산업혁명이며, 대표적 민주화는 소련의 러시아혁명이고, 대표적 세계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였다. 

-

어떤 국가든 이 흐름을 거치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약 100년에 걸쳐, 즉 2배로 압축해서 이 과정이 진행되었다. 개화기와 식민지에 근대화가 일어났고, 해방 후 군부쿠데타 기간동안 산업화가,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IMF이후 세계화가 진행되었다. 크던 작던, 앞서거나 뒷서거나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과정을 거쳤으며 21세기 들어와 대부분의 국가는 새로운 출발점 앞에 서고 있다. 

-

한국 근대화 과정에 대해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대립한다. 내 생각에 두 경우은 양립가능한데, 내재적 발전론은 근대화, 식민지 근대화는 산업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식민지란 일제만이 아닐 군부까지 포함한다. 즉 민중의 식민지 기간은 36년이 아니라 군부정권 30년을 포함해 총 66년이란 생각이다. 

-

머리를 깍고 옷을 갈아입는 근대화, 공장을 짓고 산업전선에 뛰어든 산업화, 직접투표로 대표를 뽀는 민주화,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이는 세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낀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흐름에 동조하면서도 크나큰 희생을 치루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민중들은 자발적이기 보다는 동원되었다. 즉 주체적이지 않았단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

나는 어쩌면 주체성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보통의 인간은 주체적이지 않다. 이념을 둘째로 치더라도, 불교의 참나와 힌두교의 아트만, 이슬람의 알라, 기독교의 주님을 내 안에서 느끼는 이들은 많지 않다. 주체적이라 함은 나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상대화 시킬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엄청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

나는 근대화에서 세계화까지의 과정이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체성을 강요함으로서 주체적인 사람들이 반사 이득을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앞세우기 보다는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채 그저 엄청난 희생을 감내했다. 

-

우리는 어떤 희생은 주목하고 어떤 희생을 간과하게 되는데, 대부분 주목받는 희생은 주체성을 가지고 참여한 분들이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어쩌면 주체성이 없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심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그토록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을까... 부모, 자식, 친구, 누구가를 위해 묵묵이 희생을 떠안아야 했던,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인다. 

-

한편으론 희망이 느껴진다. 지난 촛불은 동학 이래 150년만의 자발적 민중운동이었고, 유일한 성공이었다. 그 흐름이 지금의 적폐청산으로 착착 이어지고 있기에 참으로 다행이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된 시작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

정의란 무엇인가? 센델 교수가 어렵게 설명했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그냥 '공정함'이다. 공정함은 불평등이 아니라 불합리의 문제다. 불합리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걸로 어느정도 정의는 실현됨 셈이다. 공정한 사회는 근대화가 요구하는 사명이다. 오죽했으면 당연한 공정함이 시대적 사명이 되었을까. 우리가 공정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자발적으로 근대화를 완성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어쩌면 진짜 근대화는 이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재생과 청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