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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Jun 27. 2017

正名과 아름다움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으리라. 드럼은 소년 안에서 실존과 대결하기를 바라는 패기와 분노에 찬 남자를 일깨우고, 베이스기타의 반복적이고 유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선율은 인간성의 또 다른 차원, 즉 분노를 상대화하고 더 높은 곳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성에 호소한다. 이처럼 드럼은 소년의 내면에 있는 투사에게, 베이스기타는 거리를 둘 줄 아는 현자에게 말을 건다. 보컬 역시 또 다른 인간,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려고 하는 민감한 남자,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각오한 상처받은 남자를 일깨운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기타는 허풍선이에게, 선동가에게, 도박꾼에게, 인생에 맞서고자 하는 소년의 일부에게 로큰롤 특유의 우아함으로 말을 건다. 요컨데 뤼쉬의 아들 안에는 전사와 현자, 상처 입은 남자와 허풍선이가 공존하는 셈이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때> 샤를 페팽, 145-146p  


20살 시절 처음 드럼을 배울때, 베이스를 담당했던 친구도 처음이었다. 둘은 종종 어울리며 음악적 교감을 하고 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는 그때 내가 '분노(드럼)'를, 친구가 '절제(베이스)'를 담당하는 지 몰랐다. 우리의 조화가 투사와 현자에게 동시에 말을 건다는 것도. 왜냐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그냥 우리는 리듬파트로 곡의 지반을 형성하다는 정도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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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공자의 '역할과 책임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정명(正名) 사상의 대표적 표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말은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때 한 대답으로,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종종 '자자'를 '선생은 선생답게'로 오독해서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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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역할을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서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런데 최근 이 역할은 모두 한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 선생답게, 학생의 자리에 있으면 학생답게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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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글에 등장하는 뤼쉬의 아들 안에는 여러 인간이 공존 공생한다. 이들 모두의 미적 감각을 맞추려면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악기들이 합주를 통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야 한다. 맨 아래에 있는 분노의 드럼을 베이스가 절제시킨다. 베이스는 드럼의 극단적 리듬과 기타의 극단적 운율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이런 토대 위에서 기타가 깨작거리고 보컬이 노래한다. 베이스가 그랬듯이 보컬은 극단적 운율과극단적 인간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나의 곡이 연주된다. 그 조화로움 속에서 뤼쉬 안의 다양한 자아들은 충돌없이 동시에 만족할 것이다. 이것이 확대되면 오케스트라가 되고, 더 확대되면 오페라가 될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아리안족에게 거대한 희망의 메세지가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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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태백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자왈. 시로 흥을 돋구고, 예로 일어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구절이 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데, 나는 '어떤 감흥에 빠진 공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했다. 여기서 '시詩'는 현대로 치면 '힙합'과 비슷하다. 즉 힙합춤을 추는 공자를 상상하며 그의 예술관을 짐작해 본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공자는 '시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 분석(예)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조화(락)시켜 이해한다'는 해석이다. 강의에서 공자의 예술을 설명할때 이 해석을 주로 사용한다. 디자인의 방법론적 측면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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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나니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여러사람 혹은 한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여러사람이 모여서 한 사람이 되는 경험, 분열된 정신이 일치되는 경험, 정신과 신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주는 매개가 바로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공자의 정명이 필요하다. 만약 드럼이 절제를, 베이스가 분노를 표현한다면 어떨까? 자신의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욕망하면 어떻게 될까... 연주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고 연주자들은 서로를 탓할 것이다. 과거 나와 친구가 자주 다투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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