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러 생각

법과 온정

by 윤여경

나는 맞으면 경찰서로 가라고 조언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면 맞은 사람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강자인 경찰=국가에 호소해 균형을 맞춰야 한다. 만약 약자에게 정당성이 있다면 경찰=국가는 약자를 도울 것이고, 덕분에 약자는 강자가 된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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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요즘 안희정의 재판소식을 들으면서 더욱 그렇다. 처음 성폭행 사건이 불거졌을때 모든 국민은 놀랐다. 안희정 본인도 크게 당황했다. 그는 국민에게 사과했고, 피해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건이 어떻든 감정적으로 크게 반성하는듯 싶었다. 납작 엎드린 그를 보면서 권력이란게 참 허망하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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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법정 고소가 들어가자 상황이 급반전 된다. 스스로 검찰에 출두한 안희정은 성폭행을 강력히 부인했다. 인터넷에는 피해자에 대한 안좋은 이야기도 돌았다. 소위말하는 2차 가해가 행해졌다. 재판상황은 더 가관이다. 가해자는 피해자 앞에서 강제성이 없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진실공방이 벌어지자 분노하고 경악한 국민들도 냉철하게 사태를 바라본다. 무엇이 진실일까... 3차 가해일수도 있는 그의 발언은 그저 진실공방속 전략전술로 여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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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재밌는 웹툰을 본 적이 있다. 욕쟁이 할머니가 식당 손님에게 마구 욕을 하면서 서로 깔깔깔 웃는 장면이 나온다.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나고 고객은 할머니에게 좀 깍아달러고 애교를 부린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고객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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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무엇일까? 법은 일종의 계약이다. 국가을 사회적 계약이라 부르는데 사실 이 말은 '법'을 의미한다. 무형의 법=말씀이 국가로 경찰로 현현한 것일 뿐이다. 법이 계약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세상은 확 달라보인다. 모든 관계가 계약 관계로 여겨지고 수평적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신앞에 모두가 평등하듯 법앞에 모두가 평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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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과 인간이 다르듯 신의 법과 인간의 법도 다르다. 인간은 신을 닮으려 노력하지만 인간은 신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잘 그린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다. 주인공 안티고네는 국가를 배신한 오빠의 시신을 장례시키려 한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가의 법을 어긴 안티고네마저 처형하려한다. 그때 안티고네는 어떻게 인간의 법이 혈연이라는 신의 법보다 앞설수 있냐며 호소한다. 결국 안티고네는 처형당하고 그녀를 사랑한 왕의 아들은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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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현실과 법의 사이 깊은 골을 확인한다. 정의의 편인 법이 온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이다. 분명한 잘못이 있어도 증거가 없으면 잘못이 없는 법정에서 온정은 찾기 어렵다. 판사라는 강력한 권력, 검사와 변호사라는 엘리트, 증인들, 참관자들 그리고 증거들. 피해냐 가해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증거만이 중요하며 그것이 판단 기준이 되는. 이 계약관계에 온정이 들어설 틈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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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 관계에 있어 법의 효용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상하게 법정만 가면 냉철해지는 이 현실이 왠지 비현실적이다. 요즘은 법이 만능이다. 스스로 해결 할 수도 있는 것조차 법에 호소한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법에 의지한다. 그렇게 수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감정 없는 냉철한 권력아래 부모형제가 찢어지고, 친구관계가 틀어지고, 온정적 인간관계도 급격히 식어버린다. 그러고 보니 안티고네와 그의 오빠를 죽인 왕도 그녀의 외삼촌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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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계는 법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근대다. 디자인의 미니멀 모더니즘 이미지가 바로 법의 형상이다. 이런 추상적 이미지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온갖 논란과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으면, 특히 이익이 걸린 경우 개싸움이 된다. 이런 상황을 잘 요악한 공간이 국회다. 국회에는 그나마 감정이 살아있다. 국회에서 감정을 제거하면 법정 공간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을 어찌 제거 할 수 있단 말인가... 논란속에서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은 법을 아니 법을 집행하는 이들을 믿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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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양승태 사태를 보면 가관이다. 그는 법관이 아닌 정치인의 태도로 직무를 수행했다. 법을 정치적으로 거래했으며 사회적 이익을 챙기려 했다. 법관 스스로 법을 무너뜨린 현실을 목도하면서 과연 우리 시대의 법=계약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모든 국민이 법에 호소할때 법은 정작 국민을 외면했다. 반대로 모든 국민이 법을 의심하자 법은 스스로를 쇄신한다. 마치 연인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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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은 온정이 사라져간다. 양승태가 법을 악용했듯, 온정을 악용한 사람들 탓이다. 사람들은 법을 의심하듯 온정을 의심한다. 온정이 의심되어 법에 호소해 왔는데 이젠 법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긴 애초에 접근이 틀렸다. 본래 법엔 온정이 없기에 온정의 문제를 법으로 해소할 수 없다. 법은 해소가 아니라 해결의 장이다. 온정의 문제는 온정으로 해소하고 법의 문제는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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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은 아주 중요하다. 현재 법의 문제는 현재의 법관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온정의 문제는 온정을 주고받는 사람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처럼 온정을 삿된 욕심에 사용하면 모든 관계는 비극으로 끝난다. 안희정과 크레온 왕이 그랬던것처럼. 법도 온정도 없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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