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러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여경 Jul 10. 2017

첫 문장

모든 책의 첫 구절은 중요하다. 그래서 항상 책을 읽는 중간에 혹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면, 반드시 첫문장을 다시 확인한다.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첫 문장은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다'이다. 이 말은 그의 주요 저작들을 모두 통섭한다. 이 문장을 이해한다면 빅터파파넥을 이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다. 

-

나도 글을 쓸때 항상 첫문장을 가장 신경쓴다. 고쳐쓰고, 다시 고쳐쓰기를 반복하다보면, 항상 가장 마지막에 쓰는 문장이 첫문장이 되곤한다. 누군가 그랬다지 '서론'을 가장 마지막에 쓰라고. 이를 소급소급해 나가면 첫문장이 되는 것 아닌가. <역사는 디자인된다>의 첫문장, "새로운 디자인 역사책을 써야겠어요"도 가장 마지막에 쓰여졌다. 그래 '썼다'는 표현보다는 '쓰여졌다'가 맞다. 

-

인류의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의 첫 문장에는 지혜가 압축되어 있다. 오래 곱씹을수록 그 맛과 향이 더욱 강하다. 그렇게 우려나온 통찰들은 삶에 큰 보탬이 된다. 우리는 중국문화권에 속하니 <논어>의 첫 문장을 살펴보자. 이 문장에 <논어>가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쉼표와 마침표는 임의로 찍힌 것이다.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데, 보편적으로 위와 같이 찍는다. '자왈'에서 '자'는 선생님이다. 신성한 표현이라 <논어>에서는 공자를 그냥 '자'라 부른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에서는 유키치만을 '선생님'이라 부르듯이. <논어>에는 '자' 말고도, 증자와 유자가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이들의 학파가 편집한 탓이 아닐까 싶다. 

-

여튼, "선생님은 말했다. 배운 것을 때에 맞게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멀리서 함께 공부할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면, 진정 군자라 할 수 있지 아니한가." 일단 '기쁠 열'과 조화를 의미하는 '즐거울 락'은 계속 곱씹을만한 글자다. 물론 '군자'는 말할 필요조차 없이 중요하다.

-

공자는 처음으로 학습 즉, 경험을 강조했다. 그리고 친구를 강조했다. 멀리서 온 친구라... 가족을 중시하는 공자답지 않은 표현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족'이라는 단어에 공자를 가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나' 자신의 마음을 챙길 것을 강조했다. <논어>의 첫문장을 상상하자면, 친구와 함께 기쁘게 즐겁게 소풍을 즐기고, 홀로 터벅터벅 추억을 새기며 집에 돌아오는 모습이랄까. 공자는 마지막 모습에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홀로의 씁쓸함에서 진정한 군자를 강조했다. 천상병 시인이 인생은 소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새벽빛, 노을빛 아름다운 소풍을 끝내고 터덜터덜 돌아가는 뒷모습.

-

오늘은 유독 이 세번째가 신경쓰인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 이 지침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연'에게 맡긴다. 공자의 말인지 자로의 말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코뿔소도 호랑이도 아닌데 왜 광야를 떠돌아야 하는가?"라는 탄식이다. 이에 자공과 안연은 다른 대답을 한다. 자공은 우리 도가 너무 높으로 눈높이를 좀 낮춰야 한다 말한다. 이에 공자는 어찌 너는 너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탓하느냐며 타박한다. 말솜씨 좋은 자공의 오만을 우려한 가르침이다. 

-

반면 안연의 대답은 탁월했다. 남이 우리를 알아줄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부족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자 공자는 무릎을 쳤다. 이 말은 공자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제자에게 들으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내 다음 생에는 너의 집사가 되겠다며, 제자를 스승으로 추켜세운다. 진정한 친구(朋)을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친구와 더불어 공부(學習)을 한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

나는 요즘 친구의 나쁜 소식을 접하며,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된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깊게 침참하면서 내 안의 무언가와 조우하게 되었다. 바로 '조급함'이다. 조급함,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의 조급함이다. 그 조급함이 불안을 낳고, 불안은 편견을, 편견은 오만함을 낳는다. 오만함은 자신을 나쁜 행동(惡)으로 이끈다. 오만함에 이끌려 함부로 내밷은 말은 누군가에게 화살이 되어 꽂힌다. 중세 도상에서 화살은 질병을 상징했다. 꽂힌 화살은 병을 일으키기에... 

-

조급함... 어려운 문제다. 죽음을 아는 존재, 늘 죽음에 직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조급할 수밖에. 그러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정이 생명의 본질이라니, 살아 있는한 불안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불안, 조급함... 이를 어떻할 것인가... 게임을 하고 드라마나 영화를 볼까. 오락으로 불안과 조급함을 잊는 것은 잠깐이다. 오락적 쾌감 후에 오는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귀한 시간을 죽였다는 상실감이 덧대지기 때문이다. 더 강한 쾌락,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과연 이런 무한 욕망이 가능할까... 그럼 어쩌란 말인가...

-

그래서 공자+안연의 답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를 극복해야 '군자'라 말하지 않는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깔끔한 답은 기대하지 말자. 상황에 맞는 답만이 있을뿐. 우리는 <논어>와 같은 고전을 보며, 그 시대의 고민, 인류의 보편적 고민을 읽고 이를 해결하려는 역사의 시행착오를 읽으며 나만의 답을 음미해야 한다. 그래서 고전이 중요하다. 미래는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음을 잊지 말하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역사의, 고전의, 인생의 첫문장으로 돌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군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