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죽음

by 윤여경

"아름다움은 인문학으로 들어가는 가장 매력적인 문입니다" 이번에 쓰는 글에서 뽑은 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 문을 열면 도서관이 아니라 숲이 나옵니다"라고 이어진다. 이 숲은 미술작품과 텍스트가 엉켜 있다. 읽고 해석하기에 앞서 보고 느끼기를 권장한다. 그래서 편안하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난해하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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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조형예술로 여겨지지만 본래의 뜻은 '아름다움의 기예'다. 이 기예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 이 고민이 선취되지 않은 미적활동은 기능에 그칠 뿐이다. 오로지 기능만 담보하면 사용되고 소비되어 사라진다. 지속가능성이 없으니 예술이, 문화가 될리 만무하다. 이를 과연 미적활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예술이 단지 예술에 그쳐서는 안되듯, 디자인도 단지 디자인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되어야 한다. 둘 다를 취해야 비로서 미적활동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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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다. 마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이듯이. 각자의 영역, 각자 알아서 책임지고 감수해야 하는 그런 상태를 고수한다. "그만해 내 아름다움은 내가 알아서 해" 이 언명은 마치 죽음의 언명과 유사하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죽음은 닮았다. 어쩌면 아름다움이 주관적으로 전환된 것은 죽음이 그렇게 되어서가 아닐까... 죽음에 대한 어떤 의식, 의례, 예의가 사라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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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는 어떨까? 끝이 나는 것일까? 무의 상태? 그냥 알수 없으니 모른다고 말하거나, 아무말 하지 말거나 그래야 하나? 이런 가르침 혹은 명령이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기 한 것은 아닐까. 감각중심의 인간, 기계적 메카니즘, 효율과 합리 등 죽음보다는 삶, 과거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현재적 삶에 몰두한 근대인. 때문에 아예 죽음 이후의 꿈과 희망 마저도 말살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름다움의 절망의 원인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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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거 예술의 주제는 '죽음'이 아닐까 싶다. 동굴벽화, 이집트문명, 그리스로마에 이은 중세의 신박한 작품들은 모두 죽음을 향한다. 왜 이 들은 이토록 죽음에 집착했을까. 왜 그리도 죽음을 신성시 여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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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의 공통점이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한 긍정이 아닐까 싶다. 죽음 이후도 삶은 이어진다. 그것이 피안(저 세상)이든 차안(이 세상)이든 죽음은 끝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지금 잘 살면 죽음 이후가 좋고, 못살면 죽음 이후에도 댓가를 치른다. 그러니 잘 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릴지라도 이 법칙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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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대는 죽음 이후보다는 현재, 현생을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노력보다는 위락, 오락, 시간 때우고, 심지어 시간 죽이기에 몰두한다.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데,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오락의 상태에서는 '내'가 사라지는 상황, 살아있지만 죽은 상태를 즐기는 것일지도. 죽음을 금기하니 죽음을 향락하는 것일까. 오락도 적당히 해야 즐길수 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을때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이. 죽음을 건강하게 수용할때 오락=아픔=삶을 즐길수 있다.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왔다갔다하며 상대적으로 봐야 아픔과 건강이 있듯이 삶도 죽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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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아름다움도 사라졌다. 의례, 비례는 그렇다 치자. 거대함(숭고)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강렬함은 도무지 아름다움으로 쳐주기가 어렵다. 강렬함의 다음은 더 강렬함인데... 그게 가능할까? 죽음 보다 강렬한 것은 없으니 그 끝은 죽음인데...죽으면 끝인데. 게임오버가 아닌 그냥 끝. 자신이 죽음은 끝이라고 말해놓고,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이런 강렬함을 아름다움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폐가 있다. 죽음은 끝이라며. 그래서 즐긴다며. 차라리 죽음을 희망이라고 말해라. 그러면 게임오버 이후에도 기회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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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했다 다시 정좌하고 정리하자. 아름다움의 문, 그 안에는 미술이 있다. 미술의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의 주제는 희망이다. 즉 잘 살아야겠다는 현재의 의지다. 이게 죽음이 주는, 미술이 주는, 아름다움이 주는 인문학의 메세지다. 이걸 읽어야 한다. 그래야 강렬함의 늪에서 빠져나와 성실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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