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점심을 먹고 책상 앞에 놓인 메모지에 '죽음'을 끄적인다. 죽음... 이 무엇일까... 나는 아름다움의 결론으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정작 '죽음' 그 자체를 심각하게 사유해 본적은 없다.
요즘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종종 갑자기 들이닥쳐 나를 어지럽히고 혼란에 빠뜨린 다음 사라지곤 한다. 빚쟁이처럼 처음엔 그냥 두고 보았는데, 이제는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 마음을 가다듬고 혼란을 청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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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소외, 왕따, 불안함 이런 느낌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걸 알면 삶의 한순간한순간이 다르게 살아가고 다르게 행동하며 다름을 인정할텐데, 그게 잘 안되니 그냥 다같이 죽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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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신체적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죽음이다. 정신적 죽음은 현실에서 자기존재의 상실이다. 이를 논하려면 먼저 자기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복잡하다. 그냥 자기 존재는 '누구가와 함께 한다는 느낌' 정도로만 이해하자. 그렇지 않은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도 인정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삶. 오로지 자신만 있는 삶 그것은 그냥 '없음' 즉 죽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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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죽음은 확실하다. 절대적으로. 그래서 내세를 상상한다. "지금 남들에게 잘해주면 내세는 현세보다 낫겠지"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희망적이다. 반면 정신적 죽음은 불확실하다. 죽은건지 산건지 알수 없으니 끝없이 의심한다. 존재가 상실될까 불안하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 대화할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생각보다 툭 터놓고 말할 상대가 많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없다. 어떤 유명한 분은 40대에 가장 후회되는게 친구가 많아서라고 말했지만 그게 친구일까... 어쩌면 친구가 없다는 말의 반어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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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적 죽음은 불안하다. 그래서 절망적이다. 이 불안과 절망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오락과 위락, 쾌락에 빠진다.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드라마에 영화에 몰입하면 나는 종속된다. 현세적 죽음이다. 밤새 오락을 즐기고 나면 찾아오는 허탈함, 무의미함이 바로 존재의 상실감을 느끼는 경험일터다. 그래 죽음은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이라고...요즘 세미나에서 읽는 파스칼과 미키기요시가 말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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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하면 죽음에서 빠져 나올수 있을까. 나는 죽음을 긍정해야한다는 생각한다. 긍정보다는 그냥 알아야 한다. 상시적으로 우리 삶에는 죽음의 문제가 함께 한다는 것을. 그래야 죽음에서 빠져나와 삶을 유지한다는 것을. 여러가지 해법이 제시된다. 종교를 가져라, 의미있는 활동을 해라, 운동을 해라, 모험을 해라, 지금 읽는 젤딘의 <인생의 발견>은 대화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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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0시간을 잤다.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몸이 제법 가볍다. 아침에 출근해 몇가지 일을 순조롭게 처리했다. 어쩌면 10시간의 숙면=죽음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죽음을 긍정하라는 말은 오락을 하지 말고 쾌락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적당히 함으로서 삶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 나는 이것이 실존적 삶이 아닐까 싶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아니다 만약 본질이 존재라면 실존과 본질은 균형을 이뤄야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세울 문제가 아닌 동시에 고려해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