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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Sep 12. 2018

사실과 허구

“한 편에 총체적 테러의 강압이 있고, 그것은 그것의 철끈으로 고립된 인간들의 대중을 한데 압착시키는 동시에 황무지가 되어버린 세계 안에서 그들을 지탱시킨다. 다른 한편에 논리적 연역의 자기강제적인 힘이 있고, 그것은 외로운 고독 속의 각 개인을 모든 타인들에 맞서 준비시킨다. 이 강압과 힘은, 테러가 지배하는 운동을 작동시키고 지속시키기 위해, 서로 조응하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테러가, 선총체적이고 한낱 참주적인 형태에서조차도, 인간들 간의 모든 관계를 황폐화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사고의 자기강압은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황폐화한다. 사람들이 동료인간들과의 접촉과 주변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했을 때, 준비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접촉들의 상실과 더불어 인간들은 경험과 사유 양쪽 모두의 역량을 상실하니까. 전체주의적 지배의 이상적 주체는 확신에 찬 나치도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사실과 허구의 구분(즉 경험의 실재성)과 참과 거짓의 구분(즉 사유의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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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인용글을 읽으면서, 또 선생님의 설명을 읽으면서 뭔가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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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시동굴 예술을 설명하는 '주술성 혹은 마법성' 즉 원시인들은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흔한 설명을 부정하곤 했다. 비록 문자가 없던 그들에게 개념적 사고는 없었지만, 상식적으로 그림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했을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동굴의 벽화들은 주술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 역사의 기록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왠지 사실에 근거한 역사 또한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그러니까 역사와 주술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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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대인도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일치시키는 확신에 빠져 있는 셈이다. 가령 현대인들은 광고가 만든 상징적 이미지의 현혹에 속아서 살아간다. 이미 그 이미지가 허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무력하게도 실재로 받아들이다. 왜냐면 모두가 그러기 때문이다. 잠깐만 자신을 속이면 훨씬 편하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수 없고, 외로움은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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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원시인과 현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통용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 고대그리스 인들도 그랬을듯 싶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현대인에게 동굴의 그림자는 '오락'인 셈이고, 현대인들은 이념조차 경쟁을 하는 스포츠나 오락처럼 여긴다. 포스트먼의 책 제목처럼 정말 '죽도록 즐기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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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점에서 인용문의 지적은 모든 시대 인간의 공통적 착각이 아닐까 싶다. 그 착각 덕분에 학문과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리석은 점이 있다면 현대인들은 자신들과 원시인들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원시인들은 실재와 허상을 구분못했다고 말하니까... 이것 자신들은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그것이 착각이거나 혹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모른채. 이런 점에서 어쩌면 원시인들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도 있다. 최소한 그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으니까. 매번 거짓을 만들어야만 하는 정신분열적 상황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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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글 출처는 이성민 선생님 페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2033530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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