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과 예술에 대하여

by 윤여경

요즘 황금률 세미나에서 다루는 주제는 '죽음'이다. 동시에 죽음을 의식하기에 동반되는 불안과 권태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다룬다.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위락(오락)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고 두 방법의 장단점을 논하며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의 개념적 의미를 살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단어가 우리 시대에서 어떤 개념적 위치에 있는지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랄까.

-

아래의 글은 어제 세미나에서 추천받은 글이다. 긍정적인 추천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추천도 아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 글에서 말하는 현실의 모호성이라고 할까. 그런 추천이다.

-

http://inmun360.culture.go.kr/content.do?cmsid=27&mode=view&&cid=103976

-

이 글은 대중예술을 다룬다. 대중예술이 무엇일까. 읽어보니 이 글이 의도하는 대중예술은 대중문화, 벤야민이 말한 예술의 대중화가 아닌 아도르노가 우려한 문화자본인듯 싶다. 문화자본이 예술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 대중예술이다. 영화나 드라마, 스포츠, 게임 등 오락물을 말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대중예술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 취지를 인용하면 이렇다.

-

"대중예술을 공격하는 사람들, 특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예술의 맹목적인 무비판성을 비판한다. 대중예술은 세상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인 아편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예술이 현실의 문제를 이상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에 대리만족하여 현존하는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

물론 이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측면은 부정적이기 보다는 보다는 긍정적으로 본다. 이상과 현실은 분명 다르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기에 상호간 도피가 가능하다. 그래서 서로를 메타적으로 관조할 수 있다. 이 글의 의도가 이런 '도피'를 대중예술의 긍정적 측면으로 보듯이. 물론 그 '이상'이라는 것이 자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중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의 가진 태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즉, 자본화된 이상일지라도 그것은 대중과 완전히 괴리된 이상이 아니란 말이다.

-

내가 보기에 대중예술의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아닌 이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연 대중예술이 그리는 세상이 이상적인 세상일까? 막장드라마와 격렬한 전쟁, 허무한 죽음이 난무하는 강렬한 오락물에서 우리가 이상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은 이상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환타지도 있다. 그러나 그 환타지 속에서도 언제나 정쟁과 전쟁, 수많은 희생이 그려진다. 어쩌면 이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재 우리 현실을 예쁘게 포장한 것은 아닐까.

-

나는 게임과 같은 오락물의 가장 큰 문제는 '이상이 없다'에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대중예술, 즉 오락물은 승패를 가른다. 죽음과 삶이 극명히 구분되고, 등수가 매겨진다.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순서를 매긴다. 그럼으로서 경쟁을 내재화시킨다. 이기기 위해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절멸시키면 승리한다. 아니 그래야만 게임이 끝난다. 게임을 빨리 끝내고 싶은 조급증에 사람들은 더욱 잔인한 방법을 업그레이드한다. 서슴없이 가차없이 상대를 죽이기 위해.

-

이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일까? 아니 누군가의 이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보편적 이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이상은 도데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 이상이 아닌 현실이랄지라도 이런 잔혹한 태도는 왜 생기고 왜 먹히는 것일까. 대중예술이라는 탈을 쓰고, 사람들을 열광시킨후, 현실까지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의 과정에서 얻는 이익은 무엇이며, 그 과실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모두 상당이 많은 논의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

대중예술은 소모적이다. 기능적이기 때문이다. 사용을 위해 설계되고, 사용되면 폐기된다. 지속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인지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현실과 허상을 구분할 수 있다"고. 그렇다. 인간은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이 거짓말이 허용되는 이유는, 우리가 거짓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소모되어 사라질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예술은 거짓이기 때문에 소모되고 사용되고 즐겨지고 사라진다. 대중예술이 없다면, 거짓말이 없다면 우리 삶은 정말 너무 황폐할 것이다.

-

여기에 대중예술의 가치가 있다. 지속되지 않음으로서의 가치. 반대로 예술은 지속성에 그 가치가 있다. 예술은 지속됨으로서 삶에서 발효되어 문화가 되고, 굳어서 문명이 된다. 그래서 예술은 고전적 가치가 발휘된다. 하지만 소모되는 대중예술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렌트는 '대중예술'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아니 '대중문화'란 말도 언짢아 한다. 말 자체가 성립 안된다고 생각하지 때문이다.

-

자연에는 낮과 밤이 있다. 때문에 인간에게도 '깨어 있음'과 '자고 있음'이, 즉 삶과 죽음이 있다. 낮과 밤, 삶과 죽음이 반복되다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된다. 죽음은 삶의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반복적인 죽음이 바로 일상의 죽음이다. 여행, 오락(위락)과 같은 대중예술은 일상의 죽음이다. 일상의 삶에서 모험을 즐김으로서 일상을 메타적으로 보는 계기가 된다. 긍정적인 측면이다. 곤한 잠을 자고 나면 스트레스가 다소 해소되는 것과 유사하다.

-

그러나 대중예술은 지속성은 없다. 그래서 예술이 아니다. 기능성만이 있을 뿐이라 사용되면 곧 사라질 것이다. 죽는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 몰입하면 나 자신이 사라지듯이. 이것이 현세적 죽음이다. 이 죽음이 장기화되면 생의 깨어있음이 줄어든다. 시간때우기, 시간죽이기용 대중예술의 가장 큰 폐혜는 소중한 나의 시간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과도한 대중예술은 죽음을 조장한다.

-

게다가 요즘의 대중예술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최소한 잠만큼은 여행만큼은 모험만큼은 현실의 승부, 경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거기서조차 극렬한 경쟁을 해야한다. 현실에 돌아오면 눈을 더욱 부라리게 된다. 전투력이 한껏 증가되어 일상에 복귀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게임의 세계보다 현실의 세계가 훨씬 더 이상적으로 느껴진다. 그 안의 세계는 너무 무섭다.

-

나는 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과거 나의 스타크래프트 실력은 아는 사람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해 안될 것이다. 당구도 그렇고, 승부가 나는 모든 게임을 즐겼다. 그러나 요즘은 그 게임의 세계가 너무 무서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볼때마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ㅜㅜ

-

어제 이성민 선생님이 '술래'는 본래 '나그네'라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나그네란 '자기 자리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 시절 놀이에는 항상 술래가 있었다. 술래로 놀이가 끝나면 마음이 참 찹찹했다. 하지만 다음날 새로운 술래로 교체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이를 즐겼다.

-

<호모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우징아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하며 놀이의 가치를 선교한다. 놀이는 게임이 아니다. 왜냐면 승패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는 승패가 아닌 관계를 추구한다. '술래'와 '술래가 아닌 사람들'은 끊이없이 술래를 바꿔가며 '자리 있음'과 '자리 없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한다. 문제가 있다면 놀이의 규칙을 바꾼다. 그렇게 진보한다. 이미 규칙이 전제되어 바꿀수 없는, 아니 바꿀생각조차 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에 종속된 상태인 게임의 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가 사라지고 있다.

-

나는 놀이가 곧 예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미술교육, 아니 음악과 스포츠를 포함한 예술교육이 이런 놀이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승패를 가르는 야구와 축구가 아닌, 등수를 매겨 상금이나 명성을 주는 음악 경쟁 프로그램이 아닌 그냥 함께 즐기는 운동, 함께 부르고 춤추는 공연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싶다. 영화도 게임도 이런 놀이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래 좋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만큼은 대중예술도 예술이라고 인정하겠다! 문화라고도 인정하겠다. 더 쿨하게 이상이라고도 인정하겠다!

-

이런 대중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까. 분명 경쟁을 조장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파편화된 개인, 주체가 극대화되어 나만 아는 나르시스트, 상대를 짖밟아야 존재감을 느끼는 승리자, 더 많은 이들을 죽이는 영웅, 경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냥꾼을 찬양하지는 않게 되지 않을까. 이런 극도로 피곤한 '경쟁사회'가 아니라 서로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공생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긴밀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서로에게 책임을 갖게 되는 공동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아니 '사회'라는 말은 '개인'색이 너무 짙으니 빼자. 그냥 공동체가 좋겠다. 공동체가 사라지는 우리 현실에서, 만약 대중예술의 세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상향이 될듯 싶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는 과감히 대중예술에서 '대중'이라는 단어조차 떼어도 좋다는 생각이다. 왜냐면 공동체는 지속성을 보장할테니까.

keyword
이전 16화나는 디자이너로 살아오면서 '디자인'이 무엇인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