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뽀로로를 보고 아이와 함께 귀가하면서 거대한 태극기부대 행렬과 마주쳤다. 아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신났다. 태극기와 성조기을 든 어르신들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몇몇분은 흥분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훈계했다. 아이는 놀라 뽀로로 문어괴물을 보듯 얼어있었다.
-
오면서 “왜 이 사람들은 이토록 오랫동안 집회를 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정치색과 별도로) “나는 왜 이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는데 방금 책을 읽으며 답이 떠올랐다. 바로 정체성이다.
-
정체성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맥락이다. 쉽게말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나만 해도 디자이너, 직장인, 선생님, 아들, 아버지, 남편, 친구, 선배, 후배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이 정체성들은 나에게 어떤 가치와 권리를 주지만 동시에 의무와 책임을 요구한다. 가령 나는 간지나는 디자이너지만 사람들은 디자인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가져와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한다. 대부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엄청난 난제들이다. 게다가 터무니없는 금액이거나 공짜일 경우가 많은데 딱잘라 거절하지 못한다. 나는 간지나는 디자이너니까 ㅠ
-
다시 본론으로 와서 태극기부대의 어르신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질까... 어쩌면 저분들도 수많은 정체성들 갖고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체성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들 정체성이 사라진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정년퇴직, 이혼, 폐업, 건강악화 등 다양한 이유로 정체성이 하나둘씩 상실된다. 그러다 한두가지 정체성만 남게 된다. 그러면 정체성 균형이 상실된다.
-
그 중 대한애국당 당원이라는 정체성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면 거기에 나의 에너지를 집중해서 쏟을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은 에너지를 분산시키는데 하나의 정체성만 있으면 엄청난 투쟁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많은 종교와 이념이 신념이라는 이유로 그런 정체성 희생을 요구했지 않았던가.
-
그렇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투철한 이념이 아니다. 바로 다양한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하나면 의심도 사라지고 오로지 이념 혹은 신앙만 남는다. 그럼 폭력도 가능해진다. 그렇게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파시즘이 싹튼다. 도끼자루의 집합을 상징하는 그 파시즘이.
-
이런 생각을 하니 어쩌면 나도 정체성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저기 어딘가 서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다. 근데 어제밤부터 글빨리 좀 서네... 아 중요한 글쓰기 앞두고, 이런 글에 힘쓰면 안되는데...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