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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Aug 13. 2017

이 시대의 사고구조

원리와 해석의 거리가 중요하다. 근거가 되는 원리를 지킬 것인가, 다양한 해석을 존중할 것인가. 이 사이의 거리가 중요하다. 만약 둘 사이의 거리가 없다면 원리주의에 빠지고,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면 원리를 왜곡하는 오만방자한 해석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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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개념이다. 원리는 발화된 말이자 쓰여진 경전, 즉 로고스다. 로고스는 다양한 해석을 낳고, 다양한 이미지를 낳는다. 이것이 기표다. 말이 기의라면 글은 기표일수 있다. 경전은 원리이자 근거로 기의이지만, 이미지적 문자는 그 자체로 기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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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와 해석은 사실과 상징이다. 하나의 사실이 상징이 되면서 다양한 현실을 낳는다. 같은 경험을 다르게 기억하듯이. 이 현실과 기억이 바로 그림자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 뒤에 있는 인형과 모닥불 등의 장치가 원리다. 이 전체를 다 아는 자가 개념을 장악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개념을 아는 자는 즐기지 못한다. 극장에 앉은 관객들만이 진정 즐길수 있다. 원인을 모르니 결과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작 아는 사람은 지루해서 꾸벅꾸벅 존다. 영사기를 돌리는 사람처럼. 감독은 귀를 쫑긋 세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해서. 제작자는 경전을 쓰고, 평론가는 경전에 근거해 다양한 해석을 한다. 무엇이 더 즐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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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원리와 해석중 무엇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다. 물론 절충도 있다. 그래서 문자가 이미지가 등장한다. 문자로 쓰여진 문학은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아이콘화된 미술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론 이해는 후자가 쉽다. 그래서 엘리트는 문자를 대중은 이미지를 즐긴다. 정작 둘은 만나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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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만나는 영역이 있다면 원리와 해석에서다. 문자를 즐기면 원리를, 이미지를 즐기면 해석을 존중한다. 원리를 알면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수 있고, 이미지를 알면 원리를 재구성할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전문화의 함정에 빠져 둘 모두를 즐기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늘 선택을 강요한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타자, 경계인, 사케르 취급을 한다. 그렇게 그들만의 영토를 유지한다. 국가만이 아니라 생각에도 영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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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야 비로서 이 사회의 구조를, 의식구조의 큰 그림이 그려진다. 그들이 말하는 차이와 반복이 무엇인지 흐릿하게 보인다. 그 반복이 규율을 만들고 규격화을 통해 어떤 생명을 추구하는지, 그것이 다시 어떻게 법이 되고 제도가 되고 대타자가 되는지. 그 대타자가 어떻게 개념을 잉태하고 출산하는지. 나아가 그 순환적 흐름의 단절이 역사의 어느지점에서 일어나는지까지 아주 약간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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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타나토스와 에로스, 죽음과 삶, 낮과 밤의 순환적 반복이 느껴진다. 이 순환이 명상의 원리인가 싶다. 신체와 신경의 구조가 그런건가. 또한 죽음에 있어서도 영생과 소외, 예술과 오락, 희망과 절망이 구분된다. 그런데 이걸 생각하면 너무 허무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다시 동굴로 들어가라 했던가. 그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동굴밖으로 계속 전진해야 하나, 아니면 다시 돌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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