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이 심하다는 그 영화 <나랏말싸미>를 이제 보았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왜곡'을 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안했다. 평점과 댓글은 혹평 일색이지만, 개인적으로 잔인하게 동물을 해부하는 늘 똑같은 테마를 반복하지 않아 좋다. 세종보다 스님들이 주인공인 것은 좀 그렇긴 하지만...
-
나는 한글의 위대함은 '원리'가 아닌 '형태'에 있다고 본다. 소리문자의 '원리'는 자음과 모음의 구분이다. 자음은 닿는 소리고, 모음은 닿지 않는 소리다. 그 두 소리를 구분해 조합하는 것이 소리문자의 본래 원리다. 이미 대부분의 소리문자가 이 원리로 만들어졌다. 다만 알파벳은 그 구분이 분명치 않고, 알파벳을 근거로 만든 산스크리트와 티벳, 파스파 문자는 구분을 분명히 했다.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파스파 문자는 이 원리를 더 진전시켜 초중종성의 조합 원리를 활용했다.
-
파스파 문자는 몽골제국의 문자였다.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승려와 외교관료들은 대부분 이 문자에 익숙했을 것이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것이 1368년이고, 조선이 건국된 것은 1392년이다. 그리고 한글이 창제된 것은 1400년대이니 그 시차가 그리 멀지 않다. 아마도 파스파 문자 등의 소리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이 조선 땅에 상당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
이런 점에서 한글의 '원리'는 그다지 새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 형태는 굉장하다. 알파벳과 아랍문자는 물론이고 다른 소리문자들도 모두 상당히 복잡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런데 한글은 아주 단순하다. 가장 단순한 점과 직선(모음), 꺽은 선(자음)이 대부분이다. 한번 꺾은 선과 가획한 선으로 대부분의 소리를 처리한다. 그리고나서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를 추가해 다소 복잡한 소리를 처리했다. 세상이 이런 문자가 과연 있는가?
-
소리문자의 원리를 볼때, 한글과 훈민정음 해례에 나온 주역의 원리는 별로 상관없다고 본다. 다만 아설순치후 소리를 주역의 음양오행에 적용해 분류했다는 점은 상당한 업적이다. 조정의 신하들과 유학자들, 명나라의 허락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접근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인지와 같은 이들의 활약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세종은 문자를 문명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상적 원리와 통합했다. 과연 문자역사에 이런 접근이 또 있었던가... 이런 점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한 엄청난 걸작이다.
-
한글은 원리는 파스파를, 사상은 한자문명을 따랐지만, 그 형태만큼은 그 어떤 것도 따르지 않은 독창적인 업적이다. 쉽고 단순한 형태! 아트디렉터 세종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나는 현재의 한글보다 형태를 더 단순하게 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형태에 있어 이토록 쉽고, 단순한 문자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 확신한다. 세종 만세!
-
덧붙여 <나랏말싸미>에서 제일 강조하는 글자는 ‘아래 아(점)’이다. 이 점이 한글의 근본인데 현재 한글에는 이 모음 글자가 없다. 아... 세종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통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