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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Oct 20. 2017

전통의 건축, 지붕

<한국건국, 중국건축, 일본건축>

히틀러와 스탈린, 메이지 정부들은 그릇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로마 등 과거의 권위에 의지했다. 이를 신고전주의라 말한다. 신고전주의를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다. 신고전주의가 파시즘에 부역했던 탓인지 전통은 짐짓 파시즘, 전체주의를 연상시킨다. 어느새 전통은 근대의 공적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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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옛 건축에서 지붕은 한결같이 육중하다. 권위를 상징한다. 권위적인 고관대작들의 취향이다. 이들은 나라를 배반하고 일제에 충성했다. 때문에 이들의 취향, 즉 육중한 전통 지붕도 파시즘 양식이 되었다. 이를 '제관양식'이라 말한다. 

일제시대와 군부정권의 권위적인 시대에만 무거운 지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건축에서 무겁고 육중한 지붕은 수천년동안 존재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동아시아 건축에서 그런 지붕이 있었을까... 지난 몇십년을 제외하고 수천년간 동아시아는 권위적 사회였을까... 그럼 지금은 아닌가? 과거를 지워버린 탓에 그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과거도 이유도 모르니 현재도 모른다. 물론 미래는 언감생심이다.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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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관양식이라는 말을 버리고, 육중한 지붕을 다시 본다. 권위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차라리 소박하고 단아하다고 해야하나... 아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모습이 애처럽다. 왜 저 지붕들은 왜 그토록 무거움 짐을 지고 수천년을 버텨 왔을까... 이 질문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책이 <한국건국, 중국건축, 일본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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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붕에 대한 오해를 해소시켜주었다. 더불어 세 나라의 오래된 건축들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결코 다른 나라, 독립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 지역이 모두 하나의 문명임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다르다. 사는 환경의 미소한 차이가 사는 사람의 미소한 기질 차이로, 나아가 지붕들의 미소한 양식 차이로 이어진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명명백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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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축물들은 이념을 초월한다. 무엇이 올바른지 강요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명령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왜 이렇게 존재하는지, 존재 해야만 했는지 보여준다. 침묵으로 모범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전통의 모범, 무거운 침묵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적으로 듣거나 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과거를 지우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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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은 말이없다. 지붕이 자발적으로 파시즘에 부역한 것은 아니다. 지붕이 노예로 끌려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진짜 잘못한 범죄자들은 포용하고 애먹은 지붕만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무거운 지붕은 우리 역사에서 지워야할 적폐일까. 지붕을 탓한다고 부끄러운 과거가 지워질까. 지붕을 가볍게 한다고 죄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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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지붕을 '제관양식'이라 명명하는 순간 속은 시원하고 후련하다. 과거가 지워진 탓이다. 오욕이든 영광이든, 기억하고 싶은 과거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든 통채로 지워진다. 그 탓에 역사의 소재가 빈약해진다. 과거를 지우는 순간, 역사도 사라진다. 과거와 역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어쩌면 우리문화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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