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흥라떼 Oct 30. 2022

일 좀 대충 하라던 나, 대충 할 일이 어디 있냐는 나

열심히 일하던 남편의 어려운 입장을 이제야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다.

역할을 교환한 후 남편은 가사와 육아에 전념했고 나는 업무 파악과 수업연구에 몰두하며 각자 힘들고 낯선 시간을 보냈다. 남편과 나의 직업이 같아서 그런지(한 직장에서 만나 결혼한 우리) 지난 3주간의 삶을 돌아보면 참 신기하고 재밌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작년까지 칼퇴하지 못하는 남편을 적극적으로 나무라던 나는 출근한 후부터 남편으로부터 잔소리를 푸지게 듣게 되었다. 왜냐하면 작년에 남편이 퇴근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 좀 대충 해. 일이 대체 왜 그리 많아? 일은 혼자 다해? 집에서 혼자 힘들게 애들을 보면서 오빠 오기만을 기다리는 내 생각은 안 해? 

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세상 이런 악처가 없다 싶기도 하지만 애 셋을 집에서 혼자 돌보며 저녁까지 준비하던 나는 진심 힘들었다. 칼퇴를 못하는 남편을 보면 그렇게 속이 부글부글 해대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이제는 그 멘트를 똑같이 되돌려주는 남편을 마주했다.


“칼퇴 왜 안 해? 일을 대충대충 해야지.” 


3월 2일 개학한 첫날 3년 만에 복직을 해서 일을 하고 돌아온 그리고 정시 퇴근을 하지 못한 나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 푹푹 쉬며 (일부러) 보란 듯이 이 멘트를 날렸다. 남편도 그 당시 내 멘트들에 많이 상처를 받았었나 보다. 자꾸 그 당시 자신의 힘들었던 점을 내게 어필한다.


올해 내가 막상 일을 해보니……. 진짜 직장에서 대충 할 일이 어딨나 싶다. 집안일이야 좀 내려놓고, 저녁 반찬 한 가지 덜 만들고, 방 한 칸 청소 덜 할 수는 있는 문제지만 -작년에 누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면 역시 분개할 멘트인 건 잘 알지만- 직장에서의 일은 ‘대충’할 거리가 없는걸? 최소한의 것만 해도 시간이 순삭 돼서 모자라는 바람에 매일매일 허덕허덕거렸다. 3년간 굳은 머리를 다시 업무에 최적화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다. 실수에 실수가 연발되면 그걸 수습하기 위한 시간이 또 필요했다.


남편은 주말에 씻어둔 아이들 유치원 실내화 못 찾아서 허둥지둥, 유치원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빌려온 책 다시 반납하는 날인데 까먹어서 놓치는 등 남편 나름대로도 이전에는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느라 서툰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집을 중심으로 맴도는 생활이 반복될수록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게 눈에 보였다. 하루는 갑갑하다고 밤에 갑작스레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지금까지만 보면 시트콤 같은 3주였지만 사실 우울한 순간도 많았다. 일을 잘하고 싶은데 생각만큼 손과 머리가 따라주지 않아 괴로울 땐 복직을 후회하기도 했다. 말이 복직이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다 바뀌어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 적응하는 그 느낌도 힘들었다. 업무 실수라도 하면 갑자기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오르면서 잠을 잘 못 자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직장 선배처럼 옆에서 날 도닥여주던 3년 경력이 더 많은 남편이 새삼 의지가 되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도 직장에서의 일과 집에서의 육아, 가사를 최선을 다해 함께한 남편에게 새삼 고마웠다.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가정보육 중인 13개월 막둥이를 돌보다 보니 사람을 자유롭게 못 만나고 항상 아이들만 상대하는 게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했나 보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 책 한 장 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는가 보다. 남편도 치열한 적응의 시간을 보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일머리'가 생길 때까지 우리 각자 온 에너지를 쏟아부은 3주였다.


이제는?


가장 달라진 건 남편은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나는 직장생활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며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보낼지 계속해서 고민한 결과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어제는 막둥이 낮잠 타임을 노리고 아기랑 둘이서 도서관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고 한다. 가는 길에 유모차에서 막둥이를 재우는 데 성공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여러 권 빌려오더니 저녁부터는 이내 예전처럼 집중해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남편을 보았다. 그에게 여유가 생겼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에게 생긴 변화는? 무엇보다 표정이 온화해졌다. 일의 중요도가 보이고 업무 흐름을 이해하고 나니 훨씬 정서가 안정되었다. 그리고 칼퇴라는 것을 종종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카톡으로 내게 보내온 사진


이번 역할 교환은 육아를 한다는 핑계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내가 남편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육아휴직, 진짜 아빠도 꼭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서로의 역할을 경험해봄으로써 좀 더 마음이 단단한 가족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든다!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하고 싶다. 


한 번은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야무질 일인가……. 살림꾼 다 됐어.


사진 © ronnysison, 출처 Unsplash
이전 05화 난 오빠가 진짜 식단표를 만들 줄은 몰랐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