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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흥라떼 Apr 13. 2023

아이가 제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면?

아이 셋 책육아를 하며 생긴 고민

아이가 셋이 되다 보니 책장이 여러 칸이라도 그 공간을 한 아이를 위해 쓸 수만은 없었습니다. 첫째가 자라면서 글 밥이 많은 책도 들였지만 둘째와 셋째가 읽으면 좋을 그림책들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어요. 세 아이가 자라는 저희 집은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가 좋아하는 문고판 세계명작 책들도 있고 이제 만 26개월이 다 되어가는 셋째가 좋아하는 귀여운 그림책도 꽂혀있습니다.


비록 영역을 나누어놓긴 했지만 아이들이 제 수준에 맞는 책이 꽂혀있는 책장에서만 책을 고르진 않더라고요. 때로는 아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골라오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쉬운 수준의 책들을 골라오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이게 참 난감했습니다.


그림책 육아를 하며 이런 고민을 갖고 있던 중 도서관에서 그림책 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어요. 그 강사님께서는 형제, 자매가 2살 정도 차이가 나면 각자 다른 책을 읽어주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보통 2-3살 정도 차이가 나도 한 책을 펼쳐서 두 아이에게 읽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아이마다 각각 좋아하는 책 한 권씩을 읽어주는 게 더 교육적인 효과가 크다고 했습니다. 발달과 인지 수준에 차이가 나니 그 부분을 고려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또한 아이의 이해 수준보다 쉬운 책을 보는 것은 괜찮지만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보다 높은 어휘를 다룬 책은 권장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 강의를 듣고 나서 저는 '첫째가 동생들의 책을 보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둘째가 언니의 책을 같이 보는 것은 좋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그 강의를 듣고 나서 아이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니 실제 삶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첫째가 읽는 문고판 책을 둘째가 옆에서 같이 듣고 있습니다. 또 때로는 셋째가 들고 온 책이 세 살 위인 둘째가 좋아하는 책인 적도 자주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첫째는 어른들이 보는 책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남편이 읽으려고 차곡차곡 사모아 둔 소설 해리 포터, 빨간 머리 앤을 읽어달라고 꾸준하게 이야기했어요. 아이의 이런 선택이 못마땅했습니다. 강의 내용이 더 생각나기도 했거든요.


이렇게 뒤죽박죽인 책 선택에 대해 초반에는 아이들에게 짧은 코멘트를 했어요.


이건 좀 어려울 텐데?
다른 책을 고르는 게 어때?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셋째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센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하하.


하지만 한 날, 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어요. 첫째가 남편에게 '해리 포터'를 읽어달라고 했어요.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저라면 갖가지 이유를 대고 읽어주지 않았을 것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딸을 앉히고는 독서대에 그 책을 펼쳐두고 읽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이해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인데도 불구하고 최대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손짓도 하고 추가 설명도 해주면서 실감 나게 읽어줬어요.


이상하게도 아이는 그 하루의 기억이 좋았던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리고 지금까지 종종


아빠! 시간 될 때 해리포터 읽어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 모습이 제게는 참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제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아이가 제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어도 괜찮다.'로요. 상위 수준의 책이든 하위 수준의 책이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아빠가 읽어줬던 책들 중 하나인 '빨강 머리 앤'의 내용과 느낌이 좋았는지 지금은 제 수준에 맞는 문고판 세계명작 중 하나인 '빨간 머리 앤'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재밌다며 어젯밤에도 이 책을 가져오는 딸을 보았어요. 어쩌면 남편이 읽어준 그 빨강 머리 앤 두꺼운 책 한 권이 이 아이에게 마중물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셋째는 여전히 그림이 많고 글도 복잡한 우당탕탕 야옹이 시리즈를 가지고 옵니다. (사실 이 책은 제가 읽어도 재밌는 책인데) 셋째도 최근에 이 책을 둘째 옆에서 같이 보더니 하루에도 두세 번씩 읽어달라고 합니다.


이제는 저도 아이의 선택을 막지 않는 엄마라 흔쾌히 읽어줘요.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셋째는 제가 읽어주는 책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표지를 펼치고 본문에 나오는 문장 2~3개 정도를 읽어주고 나면 아이가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 수 있어요. 제 말을 도통 듣지 않거든요.


그럼 아이가 책을 보며 뭘 하는지 궁금하실 텐데 정작 아이는 그림만 봅니다. 자기가 아는 사물의 이름을 마구마구 외쳐요. 아이가 사물 이름을 잘 맞추면 제가 박수를 치며 반응해 줍니다. 그럼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어요. 그리고 중간중간 "이거는 뭐야? 이거는 뭐예요?" 하며 궁금한 그림에 대한 답을 구하기도 합니다. 지루하더라도 성실하게 답을 해주면 얼마 안 가 그 책을 또 들고 옵니다(오마이갓).


아이들은 다양한 수준의 책을 제 수준에 맞게 읽는 능력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수준이 높은 책을 때로 읽더라도 결국에는 제 수준에 맞는 책을 더 많이 더 자주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언니, 누나, 오빠, 형의 책 심지어 어른이 읽는 책을 가져오더라도 "이건 네 책이 아니야. 너무 어려울 텐데?"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그래 같이 읽어보자고 하며 아이가 뭘 원하는지 눈으로 잘 보고 귀로 잘 들으면서 곁에 함께 있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의 책 선택을 부모가 수용하고 존중해주는 그 느낌이 바로 아이가 다음 책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진 © benwhitephotography,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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