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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키타카존 Jul 03. 2022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내 멋대로 시험 바라보기

주기도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라는 구절이 있다.  '시험' 뭘까? 영어성경에는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으로 되어 있다. temptation  시험으로 번역이 되었다.

temptation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유혹, 유인, 꾐'으로 해석된다.

왜 그 많은 단어 중 시험으로 번역을 하였을까?


'시험'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1.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예) 시험과목)

2. 사물의 성질이나 기능을 실지로 증험하여 보이는 일 (예) 참치 시험 조업)

3.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또는 그런 상황 (예) 시험에 들다)




나에게 기억되는 시험의 시작은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매달 시험을 봐서 우수상을 주었다. 4과목 중 90점 이하를 받으면 우수상을 받지 못했다. 매달 그 우수상을 받았지만 3학년 1학기 마지막 시험 우수상을 받지 못했다. 그때의 실망감이 아직도 느껴진다. 부산에 있던 그 학교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우수상 걱정을 덜었다.  중학교 때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1등부터 50등까지는 교무실 앞에 큰 대자보처럼 성적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성적표를 받고 다음 시험에서는 몇 점을 받겠다 몇 등을 하겠다고 하면서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기꺼이 몸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런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난 처음 수능을 본 세대이다. 더 할 이야기는 수능을 유일하게 2번 본 세대이다. 인생을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짓는 건 너무하다는 논리였을까?  첫여름의 수능은 이게 무슨 시험일까? 해서 폭망 하고 두 번째 겨울 수능은 난이도가 첫 번째 대비해서 너무 높아서 폭망 했다. 본고사도 부활해서 본 세대이다. 수능성적을 만회하기 위하여 본고사도 보았다. 뭐 국어시험은 논술 비슷하게 나왔으니 논술도 봤다고 해야 하나. 이리저리 시험 많이 본 세대이다. 대학교 때는 심지어 전공과목은  매달 시험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학교 도서관에서 지냈다. 물론, 대학 1학년 때는 노느라 성적을 멍판으로 만든 이후에 생활패턴이지만 말이다.

난 시험날짜만 잡히면 다른 일을 제대로 못한다.  공부가 잘 안 되더라도 일단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어야 한다. 다른 곳에 있으면 왠지 걱정이 되는 스타일이다. 완전 벼락치기 공부법도 잘 안된다. 밤새는 게 싫다. 밤을 못 새운다. 시험 보기 전에도 잠은 자야 하기에 다른 대학 동기들처럼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다음날 시험을 본다는 것은 싫었다.



인생에서의 시험은 어떤 의미일까?

주기도문에서의 시험을 나는 처음엔 '어려운 상황'으로 해석했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지 않고 항상 평안함을 누리도록 해달라는 간구 정도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으시다.

 '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다. 고난을 잘 견디면 그 고난 뒤에 축복을 있는 거다. 축복을 받으려면 시련의 시기기 있어야 하는 거다.

사자성어로 '전화위복'을 바라보며 잘 견디어 내라는 의미이다.


삶의 시험을 치러야 하는 이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위한 말이 될 수 있는 있는 걸까? 어려움이 계속되는 이들에게 조금만 참는다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게 위로가 될까? 고난 뒤의 축복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나도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지금도 그 힘든 일부의 시간들을 헤쳐 나가고 있기도 하다. 다만, 분명한 건 시험에는 끝이 있을 거다라는 생각이다. 인생의 시험을 잘 치르는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시험이라면 절망의 나락에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밝음을 바라보며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책이 있다.

앤서니 드 멜로의 " 바다로 간 소금 인형 "이다.


소금 인형 하나가 뭍을 두루두루 여행하다가 마침내 바다 앞에 이르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소금 인형이 바다에게 말을 걸었다.

바다는 빙그레 웃었다.

"들어와서 직접 확인해 보려무나."

소금 인형은 바닷물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바닷속으로 향해 나아 갈수록 소금인형의 몸은 점점 녹아서, 나중에 가서는  아주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마지막 알갱이가 녹는 순간 소금인형이 경이감 속에서 외쳤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


소금인형은 바다가 궁금해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알갱이가 녹는 순간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라고 한다. 왜 네(바다)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게 아니고 내(소금인형 자신)가 누구인지 알게 된 걸까?

결국은 나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에 나를 던져야 한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삶의 시험에 임하는 나의 자세는 그 시험에 나를 던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 속에서 나를 알 수 있다. 슬픔이 닥치면 울어야 한다. 온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여 슬퍼해야 한다. 괴로울 때는 괴로워야 한다. 삶의 시험에 태연한 척 하기보다는 그 시험을 온몸으로 치러내야 한다. 소금인형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느낀 것처럼 말이다.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는 표현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시련이야 맞을 수밖에 없지만 악마의 꾐에 빠져 행하는 그릇된 행동은 없기를 바란다는 표현이라고 본다.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도 말고, 어려운 삶의 시험도 겪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시험과 같은 피하고 싶은 이야기 말고 행복을 이야기해야겠다. 뭐라 해도 행복한 삶이 좋은 거다. 평범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안에서 슬퍼하는 사람도 있으니 행복 찾기도 단순하고 쉬운 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중학교 2학년 큰아이가 인생의 첫 기말고사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 초등학교는 성적을 매기지 않고, 중학교 1학년은 미래를 고민하며 꿈을 찾으라며 자유 학년제로 시험을 보지 않는다. 아이가 시험공부 하는 모습에서 갑자기 시험에 대한 생각이 나서 '내 멋대로 시험 바라보기'를 적었다. 브런치를 하나하나 적어가는 것도 글을 적고 발행을 하고 조회수와 라이킷의 결과를 기다리는 시험일까? 그렇다면 즐거워서 하는 시험도 있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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