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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키타카존 Jul 06. 2022

다시 그를 만나다.  <‘작별인사’(김영하)를 읽고>

내 멋대로 죽음 바라보기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그를 만날 날을 기다린다. 난 지금 지구에 살고 있고, 그는 천국에 있다. 천국은 공간의 개념은 아니지만 그냥 서로 다른 공간에 있을 뿐 만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한다. 어릴 적 친한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살아있다면 지구라는 공간 어딘가에 있겠지. 천국에 있는 그와 지구에 있는 어릴 적 그친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의 입장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건 같다.

반려견의 죽음에 슬퍼하던 다른 친구는 불교가 좋다고 한다. 기독교에선 동물은 영이 없는 존재여서 다시 반려견을 만날 수 없지만, 불교는 윤회설이기에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반려견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

얼마 전 만난 친구는 미국에서 장모님이 돌아가셨지만 코로나로 장례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친구의 아내는 천주교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천주교는 지옥과 천국 중간인 연옥이 있다. 어머니는 지옥에는 안 가셨을 것 같고 만약 천국에 못 가시고 연옥에 계신다면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는 휴머노이드라는 인간을 닮은 로봇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철이’는 평양의 휴먼매터스 캠퍼스에 산다. 인공지능의 윤리적 선택을 연구한 아빠와 홈스쿨링으로 철학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를 마중 나간 어느 날 철이는 어느 수용소로 잡혀간다. 사실 철이는 무등록 휴머노이드였다. 그곳에서 장기이식 등의 의료 목적으로 배양되어 생산된 클론인 ‘선이’를 만난다. '선이'는 그곳에서 뛰어난 거래 능력으로 다른 애완용 휴머노이드인 ‘민이’와 살아남아 탈출한다. 탈출하던 중 재생 휴머노이드인 '달마'를 만난다. 그들은 지하에서 버려진 휴머노이들과 산다. 달마는 육체가 없이 의식의 업로드를 통한 영생과 통합을 이야기한다.

"당신의 의식과 기억을 클라우드에 올릴 것이고, 그게 완료되면 당신은 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철이'를 찾으러 온 아빠가 신고한 기동타격대에 의하여 철이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아빠는 급히 철이의 머리를 가지고 휴먼매터스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국 고양이 로봇 몸에 들어간 '철이'의 의식은 아빠가 고양이 로봇을 부숴버려 육체가 없는 순수한 의식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철이'는 클라우드 안에서 외부 카메라 등을 통하여 '선이'를 찾아 헤맨다. 그러던 중 시베리아 어느 마을에서 선이를 발견한 '철이'는 '달마'의 도움으로 새로 만든 예전의 흡사한 휴머노이드 육체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이제는 나이가 든 '선이'를 만난다. '선이'는 늙고 병든 클론, 망가진 휴머노이드들, 버려진 동물들과 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고 '선이'는 조용히 잠이 든다. 홀로 남겨진 '철이'는 어느 날 곰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클라우드로 돌아갈 스위치 누르기를 하지 않은 채 의식은 육체와 함께 사라진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겠지만, 그리고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꿈도 없는 깊고 깊은 잠을 자면 된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는 말했었다.  "네가 너고 내가 나라는 것도 모르고 만나게 될 거야. 어쨌든 만나게 돼.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왜 '철이'는 그런 결정을 했을까? 확실한 네트워크 안의 영생을 택하는 대신 불확실한 어느 곳에서 '선이'와의 만남을 택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만날 수 있을지,  또 만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시간 어느 곳에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선이'와 만나기를 선택한 거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언제인가 어느 곳에서 인가 우연히 스쳐만 가더라도 다시 그를 만나고 싶은 간절함에 택한 결정이다. 설사 육체가 없는 의식의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하여 불교의 '법화경'에 나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철이'와  '선이'를 헤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철이'는 다시 ‘선이’와의 만남을 위하여 죽음을 기꺼이 택한 것이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만남을 위하여 다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나에겐 천국으로 가버린 그가 있다. 천국으로 가버린 그를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천국에 간다면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철이'의 선택보다는 나을 수 있다. 그곳에서 난 그를 최소한 알아보기는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천국으로 간다는 단서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헤어진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날 수도 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를 지구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너무나 오래된 기억 속의 친구라서 내가 그 친구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존재는 알지만 다시 우연히 지금 어느 순간 스치더라도 내 기억은 그 친구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아님 너무 커버리고 또 나이가 들어버린 우리는 서로가 달라져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다 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선이'의 말이 지금이 시점의 지구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네가 너고 내가 나라는 것도 모르고 만나게 될 거야. 어쨌든 만나게 돼.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명한 것 같지만 이 넓은 우주 안에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공간 , 아니 공간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운 그 안에서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건 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김영하의 작별인사를 읽고 죽음을 내 멋대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유한한 존재이기에 현재에 더 충실히 살고 혹 먼저 이별한 이들로 인해 슬퍼하지 말았으면 한다. 종교적 해석은 다르지만 우린 언젠가 어느 모습으로 만나리라는 같은 이야기에 헤어짐도 또한 죽음도 덤덤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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