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외할머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내 어릴 때 이야기를 물으려면 ”엄마의 엄마는 어땠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그립고 고마운 외할머니가.
외갓집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있었다. 마을 저 안으로 산에 올라가는 길 바로 앞의 고샅 맨 끝에서 두 번째 작은 흙집이 할머니의 집이었다. 아주 어릴 때 기억나는 출입문은 싸리문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함석 대문으로 바뀌었다. 그래 봤자 문을 잠그길 하나, 잠근다고 못 열기를 하나, 연다고 훔쳐갈 게 있길 하나, 그런 동네의 그런 집이었다. 초가지붕이 함석지붕이 된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문을 열면 마당을 둘러 왼쪽부터 장독대, 집, 텃밭, 변소간, 흙담이 둘러있고, 집 뒤켠에 작은 장독대와 버려진 작은 뜰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우산이끼, 솔이끼가 잔뜩 자라던 습한 곳이었다. 집의 뒷담장은 얼기설기한 싸리 그대로였는데, 그 너머 집이 빈 지 오래라 굳이 담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텃밭은 얇은 대나무 담을 사이에 두고 산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집에서 혼자 사셨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풍으로 돌아가셨고, 혼자된 할머니는 다섯 남매 중 아직 학생이던 막내 외삼촌하고만 함께 살았었다. 막내 외삼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가면서부터 할머니는 온전히 혼자였다. 가끔 할머니가 혼자 마루에 앉아 우는 걸 보았다고, 앞집에 사는 동갑내기 미란이가 나에게 귀띔해준 적이 있었다. 외로움이었을까,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고달픔이었을까.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쉰아홉 살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이미 손주가 일곱이셨다. 이모네 셋, 우리집 셋, 큰삼촌네 하나. 지금 내 나이에 이미 손주가 셋 이상 있으셨던 거다. 그중에 할머니네 집을 들락거린 것은 나뿐이었다. 방학 시작과 동시에 가서 개학 직전까지 할머니랑 살았다. 흑백 TV는 밤이 돼야 시작하던 시절이고, 시골 동네 아이들은 나름 바쁜 일꾼들이라 자주 놀 새도 없었다. 나는 심심해 죽겠다면서도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간다고 졸랐다.
외갓집이 너무 좋았다. 할머니네 집에 가면 별 것 아닌 것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가마솥에 해주시는 밥이며, 누룽지며, 된장에 찍어먹는 오이며, 뒷마당 장독에서 꺼내 주시는 김치랑 겨울 동치미 같은 것들은 어디서도 다시 맛볼 수 없는 외할머니의 맛이다. 집에서 먹지 않던 것들도 거기선 잘 먹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시골과 할머니의 모든 것을 다 사랑했다. 콩기름을 먹인 구들장, 할머니가 종이부채로 부채질해주는 소리, 쿰쿰한 머릿방의 곡식과 짚새기 냄새, 이른 저녁에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굴뚝 연기가 좋았고, 할머니랑 밤마실 간다고 동네 탱자 울타리 옆 말랑말랑한 진흙길을 걸을 때, 걸음마다 고무신이 간죽간죽대던 소리가 좋았다. 다리가 아프다고 할머니 등에 업히면 햇빛에 익은 할머니 살 냄새에 잠이 솔솔 왔다. 가끔은 할머니 심부름으로 '점빵'에 한 홉 들이 정종 병을 가져가서 막걸리를 받아오곤 했다. 나중에 어느 그림책에 보니 그 막걸리를 집에 오는 도중에 훔쳐먹는 아이가 있던데, 나는 그런 짓은 한 번도 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고스란히 갖다 주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저녁밥을 지어먹고 나면 할머니는 다 녹이 슨 분유통에서 담뱃가루를 꺼내어 얇은 종이에 말아 한 대 맛있게 피우셨고, 그러고 나서 방에 있는 주황색 흑백 TV를 켜고 창호문에 머리를 기대고 쓸쓸한 표정으로 보시곤 했다. <전원일기>를 보시며 가끔씩 헐헐 웃으시기도 했다. 그때는 김혜자 엄마와 최불암 아빠가 정말 부부인 줄 알았었다. 그 모든 말과 행동, 할머니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TV를 보는 할머니 다리를 베고 누웠다가 잠이 드는 밤이 좋았다.
내가 외갓집에 가서 가장 즐겨하는 놀이가 있었다. 불놀이다. 할머니네 부엌에는 늘 마른 솔잎이 잔뜩 쟁여져 있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마루에 앉아 무료하게 할머니를 기다리며 바라보던 고샅길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담장 너머로 한가득 솔잎을 지고 오는 할머니의 지게가 넘실넘실 보이곤 했었다. 그렇게 힘들게 긁어다 쟁여놓은 솔잎을, 나는 아궁이에 넣고 하릴없이 불장난으로 없애곤 했다. 할머니가 집 태워먹는다고 그렇게 말려도 불장난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했다. 낮에 아무도 없을 때면 '할머니 모르게 조금만 해야지.' 하고는 아주 조금 가져다가 성냥불을 그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고, 솔잎은 한 뭉텅이씩 없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논이 조금 있을 뿐이었고, 그것으로는 생계가 어려우셨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매일 아침에 집을 나서셨던 건 남의 집 일을 거들고 품삯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의 불놀이는 할머니의 고단한 노동을 자꾸 더하는 짓이었던 셈이다. 그런 할머니의 힘든 하루를 이해했더라면 아마 나는 불놀이를 하지 않았겠지만 열 살이 되기 전의 내가 철딱서니라는 것이 있었을 리가 없다.
불놀이를 그만둔 건 할머니의 슬픈 울음을 본 후였다. 어느 날 할머니가 가슴이 아프다며 마루에 앉아 우셨다. 나는 할머니가 나 때문에 속상해서 우는 줄 알았다. 내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마음이 아픈 거구나. "할머니, 다시는 불장난 안 할게." 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아프셨던 것이다. 위암이었다. 나는 이제 불놀이도 안 하는 착한 손녀가 될 것이었는데 할머니는 그 겨울을 마지막으로 시골집을 떠나 큰외삼촌 댁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이 어렵다고 했고, 어른들은 어느 용하다는 돌팔이에게 할머니를 보이고 약을 지어온 것 같았다. 매 끼니마다 한 움큼씩 약을 먹고도 할머니는 나아지지 않으셨다. 그리고 1년이 좀 지나서 어느 무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내가 4학년 때였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큰외삼촌에게 "꿈에... 집 담장에 구멍이 나서 자꾸 애기들이 들어와싼디... 한 번 가보고 오니라..." 하셨다는데, 삼촌이 "집 멀쩡해, 엄니." 하는 말을 곧이듣긴 하셨나 모르겠다. 장례를 치르고 가본 시골집은 멀쩡하지 않았으니 삼촌도 거짓말을 했던 셈이다. 담장은 그대로인데, 집은 왼쪽으로 흔들려 무너져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살고 안 사는 것에 집이란 것이 어찌 이토록 예민할까. 무너진 집을 보며 그제야 할머니의 부재가 실감이 났다. 이제 방학에 나를 품어줄 외갓집은 없어진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를 마냥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어졌다. 고집이 세고 자꾸 뭘 물어보며 귀찮게 하는 나를 어른들은 좀처럼 예뻐하거나 감싸주지 않았다. 우리집에 오면 맨날 스포츠 중계만 보던 막내 외삼촌은, "삼촌, 왜 어떤 때는 1점이고, 어떤 때는 3점이고 그래? 공이 멀리 가면 점수가 높아?" 하는 내 질문에 끝까지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야구도, 농구도, 배구도 모두 다 삼촌 옆에서 TV를 보며 혼자서 규칙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답답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할머니랑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사실 없다. 내가 얘기를 안 했을 리는 없다. 아마 지겹도록 말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화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답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말을 하고 할머니는 들어주었을 것이다.
할머니란 얼마나 감동적인 존재인지...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를 주지 못한 데 대해서 내가 미안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행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신다. 오리가 어릴 때 처음 어린이집에 갔다 와서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을 자꾸 읽어달라고 하니 크게 복사를 해서 하루에 수십 번씩 지치지도 않고 읽어 주시던 할아버지다. 오리는 ‘할아버지’ 말만 나와도 눈물이 그렁하다. 할아버지 목소리를 저장하려고 모든 통화 자동녹음 앱을 깔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바해서 월급을 타자 할머니 드릴 꽃바구니를 제일 먼저 사던 아이다. 내게 부족한 것들을 조부모님께 차고 넘치게 받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 추억이 치유와 회복의 샘이 되겠지.
* 그림: 월터 랭글리, Memories(1906). 볼 때마다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