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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Nov 06. 2022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나는 니가 아무 것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정희가 이렇게 말했을 때 S의 눈과 볼이 그 순간 살짝 붉어졌다고 느낀 것은 정희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앞날 창창한 젊은 아이가 엄마뻘 어른에게서 듣는 말치고는 적잖은 오해의 소지도 있었으리라. 밤 늦은 시각, 커피와 아이스박스 케익을 사이에 두고 S와 정희는 몇 초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창 밖에 내리던 눈은 어느새 비로 변해있었다.




트로피 차일드(trophy child).

S를 떠올릴 때마다 정희는 이 단어를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의 자랑이자 업적이며, 특별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그 집단의 독보적 성공사례로서 상징성을 지닌 아이. 영광인지 굴레인지 모를 그 상징의 무게를 기꺼이 지고 갈 거라고, S는 몇 년 전에 정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힘들지 않겠냐는 정희의 물음에 "부모님이나 이 모임 덕분에 살아있는 거니까요. 저도 하고 싶어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흠잡을 구석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왔다. 모든 팀 과제를 하드캐리해서 탁월한 성적으로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무임승차자들의 몫까지 책임지느라 며칠씩 밤새 땜빵하는 게 다반사였다. 자신이 대표해야 할 집단의 모든 행사에 롤모델로서 충실히 역할을 감당하며, 반듯하고 훌륭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완벽한 트로피였다.


정희는 그토록 완벽한 사람을 하나 더 알고 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K는 자신에게 전화로 문의하는 모든 직원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다. K에게 전화하는 이들은 대개 아주 초보적인 것조차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전화부터 한다. 그렇게 전화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K는 하나하나 천천히, 정확하게 솔루션을 알려준다. 한번 통화한 이들은 다음 번엔 좀더 당당하게, 당연하게 전화를 건다.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다. 갑자기 일감을 던지는 팀장의 무리한 요구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저 아이같은 목소리로 "아이 차암~" 하고 느릿하게 대꾸하고는,  예기치 않았던 야근을 묵묵히 하곤 한다. 모두가 그를 한목소리로 칭찬한다. K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칭찬할 일인 건가... 사실 K에게 오는 문의전화의 80%는 그의 업무가 아니며, 갑작스런 야근은 수당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의전화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K가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동안 그저 멍한 눈으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K는 전화를 돌리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준다. 그 부서에서 가장 오래 일했지만, 공무원도 아니고 T/O에도 포함되지 않는 공무직(일용직)의 미덕인 것이다.


평소에도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다. 느릿하고 천진난만한 말투로 아무도 거스르지 않는다. 휴게실에서 삼삼오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할 때도 결코 말을 보태는 일이 없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엉마알?" 할 뿐이다. 며칠 전 월요일 아침엔 너무나 온화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어언늬이~ 병원에선 뭐래에?" 했다. "무슨 병원?" "아이 차암~ 언니 자꾸 신물 넘어온다고 병원 간다며어~" 그저 아줌마들 수다거리로 역류성 위염을 들먹이곤 맘에도 없이 '병원이나 가볼까봐' 라고 흘려 했던 말을 K는 꼭 기억했다가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정희는 S의 그 탁월함, K의 친절함이 싫었다. 그러지 않으면 버려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 완벽의 강박과 죄책, 그 무거움을 그들만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거움이 겁나서 정희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두려웠었다. 졸업을 앞두고 눈이 소복이 내리던 어느 밤, 술에 취해 집으로 걸어가던 정희는 문득 어깨에 내려앉은 눈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이 거지같은 눈... 나를 하얗게 빛내줄 것처럼 얼러대지만 결국 파묻을 거잖아... 이 더럽고 무거운 눈이 나를 죽이고 말 거야.


정희의 눈에는 S와 K의 어깨에 얹어진 눈송이가 자꾸 걸려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에 기쁨을 주는 S의 유능이 싫었다. 눈처럼 더러운 칭찬을 어깨에 잔뜩 짊어진 K의 한없는 친절이, 찬찬하고 잔잔하지만 유아스런 말투가 싫었다. 어느날 여자 화장실  칸에서 K 낮고 빠르고 똘망한 전화 말투가 들렸을 때 정희는 그 낯선 목소리에 쓴웃음이 났다. '그래, 이제 사람같네...'


살아남기 위해 친절해야 하는 자의 웃음, 버려지지 않기 위해 유능해야 하는 자의 열심, 그리고 그 웃음과 열심을 열렬히 응원하고 착취하는 하얗고 더러운 눈... 정희는 그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났다. 술에 취해 눈을 맞으며 걷다가 아무도 밟지 않은 순결한 눈 위에 주저앉아 몸서리를 치며 온갖 오물을 다 토해냈던 그날 밤처럼, 신물이 넘어왔다. 




S는 단정하게 앉아서 곧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게 되면 무엇 무엇에 도전하고 싶은지를 '첫째, 둘째' 하며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S는 온통 반짝이고 있었다. 커피숍에 들어오기 전에 그의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커피숍의 온기로 이슬처럼 맺혀 은은한 주광색 조명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정희를 바라보며 느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심사하는 교수 앞에서 프리젠테이션하듯, 지금 자신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고, 설령 뽑히지 않아도 이 모든 과정에 감사하며, 만약 뽑힌다면 모든 순간을 의미있게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정희는 S의 말을 온전히 믿었다. 그러나 정희는 S가 하는 다른 말도 듣고 있었다. "나를 뽑지 않으면 그들은 마음에 걸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도덕의 트로피, 공정의 트로피이니까요." S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될 것이다. 그것이 흰 눈의 계약이다. 가식과 착취의 기막힌 균형... 


정희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벌컥 들이키자 위가 긁히는 느낌이 났다. 신물이 역류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정희는 S에게 기어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되지 마. 아무 것도 이루지 마, 제발... 미국 가면 그냥...!" 정희는 차마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S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트로피처럼 반짝이던 S의 눈이 멍하니 정희를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상냥한 웃음기가 가셨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S의 귀 밑 목덜미에 커다란 검푸른 반점이 설핏 드러났다. 태어나자마자 폭설 속에 버려진 이유라던...


비가, 눈을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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