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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Feb 11. 2024

하늘에서 양파가 내린다면

작년 연말에 사무실 절친들과 함께 천변으로 캠핑을 갔다. 느닷없이 결정해서 바로 낼모레로 예약하고, 장 볼 시간이 없으니 각자 집의 냉장고를 파보기로 했다. 먹다 남은 와인, 냉동실에 굴러다니던 고기, 처치 곤란한 과자와 라면 등등 가져가기로. 좋긴 한데... 나처럼 융통성 없는 J는 급조된 모임이라도 준비할 건 다 해야 한다. 절친 둘 다 캠핑이 처음이라 나는 전날 밤잠을 설치며 바리바리 캠핑짐을 쌌다. 메뉴를 궁리한 후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식재료를 이것저것 챙겼는데 아뿔싸... 양파가 떨어졌다. 있는 줄 알았는데... 요알못 J는 대체재를 못 찾는다. 출근길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아침 여덟 시가 좀 넘어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는 언니였다.

"어, 언니~ 오랜만이어요.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오늘 출근하지?"

"지금 사무실인디요."

"그래? 잘 됐네. 딱 기다려. 잠깐 들를게. 시간 오래 안 뺏을겨."


언니는 한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다시 전화를 걸어 "차 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바로 달려 내려갔다. 언니는 차 깜빡이를 켜고 갓길에 서 있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자동차 트렁크에서 아이스박스를 꺼내며 내 차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나도 차 트렁크를 열었다. 캠핑 짐이 차곡차곡 쌓인 틈에 언니는 아이스박스 두 개를 무겁게 실었다.


"울 엄마랑 내가 담근 섞박지, 오이 절임, 곱창김, 이거 좋은 거야. 얼린 고등어랑 꽃게, 울 엄마 집에서 딴 대봉, 맛은 없어. 울 엄마 밭에서 캔 무랑 감자랑 양파, 그리고..." 바쁘게 숨을 몰아쉬며 말하더니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이건 나의 마음!"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언니는 손을 흔들었다. "어제 갑자기 생각나서... 친정 언니 해주고 싶어서 왔어. 일 봐. 간다."


양파라구? 나는 그날 언니가 준 양파 덕분에 캠린이들에게 감바스 알 아히요와 매운 닭발 볶음을 해주었다. 술은 와인인데, 이 조합 도대체 무엇? 열네 살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메뉴들이지만 아무렴 어때! 아침에 있었던 신기한 일을 이야기하면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양파만이 아니다. 요즘 이상하게 이런 일들이 종종 생긴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니까." 내 말을 들은 친구는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대체 얼마나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거냐?" 떠들진 않고 찡찡거리긴 했다. 기도도 아니고 정말 찡찡거렸다. '양파 안 들어가면 맛이 없어요. 마트 갈 시간도 없는데 진짜 똑땅해요.' 딴에는 간절했다. 그러니 그 양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다.


얼마 전에는 급기야 세탁기와 건조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지금도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비싼 제품이어서가 아니다. 여름에 고장 난 세탁기를 여태 바꾸지 못했던 건 돈보다는 결벽증이 심한 딸의 반대 때문이었다. 제 방 침대를 낯선 사람들이 밟고 올라가서 창문 너머 다용도실의 세탁기를 꺼내고 들여야 한다는 것에 기겁한 오리는 계속 "나중에! 지금은 안 돼!!"를 외쳤었다. 딸의 성질을 잘 아는 나는 세탁기가 아예 멈출까 봐 불안해하며 수없이 투덜거렸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더니, 세탁기 바꾸려고 이사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 녀석 똥고집 어떡하죠?'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로, 일면식도 없는 분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주신다는 말을 했을 때 딸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찬성했다. 그러니 분명,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다.


"요즘 이상해. 그냥 생떼 부린 건데 하나님이 들으시는 거 같아. 너무 신기해."

"ㅋㅋ 그니까 말이야. 엄마, 다음엔 좀 큰 걸 달라고 해 봐."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너무 흥분해서 다음엔 뭘 달라고 졸라볼까 이것저것 생각하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났다. 정말이다. 크고 좋은 집? 로또? 어, 잠시만... 내가 정말 그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양파를 원했던 날이 순수하게 간절했다. 억지로 쥐어짜려고 하니까 양파만큼도 원하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헛웃음이 났다. 지금 내 신세가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까지 모자란 것도 없네 싶었다.


"지금 삶이 만족스러워?" 친구가 내게 물었다.

"적어도... 억울하거나 슬프진 않은 거 같애."

"좋은 일이다."




그런 일들이 있은 후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양파 하나를 절실히 필요로 했던 때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말고, 온전히 내게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지금의 삶이 불만스러워서가 아니라 낯선 미래의 선물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대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예전의 나는 그런 가볍고 편안한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매사에 무겁고 절박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결핍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구걸하지도, 애원하지도, '안 주시면 죽어버리겠다'라고 협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툴툴거릴 뿐이다. 꼭 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안 주시면? 굳이 필요치 않으니 안 주시는 거겠지 생각한다. 내게 정말로 필요하다면, 팔자에 없는 친정 언니를 급조해서라도 보내주실 것이다. 난 그저 툴툴거리면 된다. 소소한 잡담을 나누듯. 마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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