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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Apr 14. 2024

할 만해서

이런 것을 좋아한다,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런 일을 규칙적으로 한다...


'나'를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I am what I (   )."라는 문장의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동사들 말이다. 철학자 윌 듀런트는  <The Story of Philosophy>라는 저서에서 "We are what we repeatedly do."라고 말했다. 뒤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Therefore, excellence is not an act, but a habit." 나는 오랫동안 이 두 문장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행위를 습관으로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발견하고 반복하며 노력했다. 음... 그렇게 믿었다.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바쁠 때 오히려 더 시간을 쪼개서 운동을 하고 책을 읽었다. 업무나 제대로 하라는 타박에는 예의 차리지 않고 비웃어주었고, 누군가가 "요새 일 없나 봐?"라고 말했을 때는 발끈했다. 거창하진 않지만 '읽는 사람', '쓰는 사람', '걷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나의 작은 정체성에 스크래치가 난 것 같았다. 바쁘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그래야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지난 2월과 3월의 극한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괄호 안의 동사들을 잃어버린 채 새벽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보고서와 출장과 민원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국 지자체 중에서도 두 번째로 추진하는 업무의 스타트를 맡게 되었다. 17개소 6천 명의 민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무이다. 현장 운영인력도 20여 명이다. 의사결정권자들이 있긴 하지만 실무 책임자가 당장 결정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 밀려왔다. 기존 체제를 개편하는 사업이라 저항이 거셌다. 욕설과 위협과 신고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벨이 울렸다. 현장 담당자들과의 단톡방은 순식간에 100건이 넘는 톡으로 가득 찼다. 점심때는 5분 만에 도시락을 혼자 해치우고 도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든 것이 '최초의 케이스'인 데다 한 군데에서 발생하는 사안은 17개소에 공통으로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컸다. 조금만 삐끗하면 칼 같은 민원과 현장인력의 비난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그렇다고 그때그때 제출해야 하는 일상적인 자료와 보고서를 안 낼 수 없으니 그건 민원이 없는 밤에 해야 할 몫이었다.


아마, 그 와중에도 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체육관에 달려가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덤벨을 잡기도 했다. 내 몸은 사실, 버텨낼 수 있었다.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미련한 짓이야.' 선은 넘은 후에야 자신이 넘은 줄 알게 된다. 그전에 멈춰야 했다. 매일 잠을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꿈에서도 업무를 보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하다가는 죽는 거였다.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괄호를 비웠다.


'repeatedly do'로 쌓은 정체성이란 참 놀라운 것이다. 괄호를 비운 그 순간부터 손에 쥔 모래처럼 쉬지 않고 빠져나갔다. 근육이 물렁해지고 생활도 물렁해졌다. 어느 날 저녁 난장판인 집 식탁에 앉아서 나는 딸에게 말했다. "우울증 냄새가 나." 대학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언니는 진짜인지 허세인지, 자기는 감기를 냄새로 알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다른 룸메이트 언니가 몸이 안 좋다고 했을 때 정말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감기는 아니라며 비타민 먹고 푹 쉬라고 다독거려 주었었다. 그 언니 전공이 건강교육과였는데 그런 걸 수업에서 배우느냐고 물으니 언니는 웃으며 "감기에 하도 많이 걸려봐서 감으로 아는 거"라고 했었다. 그것도 역시... repeatedly do에서 오는 탁월함이었을까.


나의 우울증 타령에 딸은 금세 표정이 굳었다. "엄마, 안 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나는 대답했다. "응. 그 앞에서 멈추려고 고삐 잡고 있어. 자꾸 미끄러지는데... 그땐 딸이 좀 도와줘야 돼." 오랜 우울증 끝에 나도 우울증 냄새를 맡고 어느 선에서 무엇을 멈춰야 할지 감이 오고 있다. 다시, repeatedly do의 촉이다. 괄호를 다 비우고 애써 쌓아 놓은 정체성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회귀하는 지점이 우울증이라니, 정말 넌더리가 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순간순간 과거의 익숙한 감정적 반응들이 혈관에 확 퍼질 때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 혈중 찌꺼기들을 희석시켰다. 딸과 톡을 주고받고 임윤찬의 라피협을 플레이하고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4월이 되고 봄꽃들이 한창인 요즘, 나는 지금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다시 읽고, 그간 3kg이 넘게 불어나고 물렁해진 몸을 비우려고 단식 시간을 늘리고 있다. 레깅스에 몸을 구겨 넣을 만해지면 다시 이어폰을 꽂고 체육관에 갈 것이다. 점심에 45분을 알차게 걷고, 새벽에 일어나 논문을 읽을 것이다. 그렇게 괄호 안에 모래를 한 톨 한 톨 쌓아 올리고, 우울증의 인력에서 멀어지겠지.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시간 많네. 일 없나 봐?"라고 물으면 예전처럼 화가 나진 않을 것 같다. 내가 '나는 이러이러하다'라고 확신했던 모든 것이 사실 다 '할 만해서' 가능했음을 인정한다. 극한에 몰리면 내게 남는 건 생존자의 우울증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내게 그 말을 했던 사람을 포함하여, 도저히 괄호를 채울 수 없을 만큼 한계점에 임박한 이들이 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repeatedly do)를 가능케 해주는 '할 만 함'에 대하여, 나의 작은 정체성들이 주는 사치에 대하여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하다.


이제, 사무실에 나가서 보고서를 써야겠다. 할 만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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