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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Sep 13. 2020

모두가 단 한 사람

"엄마 글이 너무 유명해지면 어쩌지?"

"그럴 일 없어."

"라이킷해주시는 분들 있잖아."

"그분들은 라이킷 요정들이야. 브런치 수호신들이라고."

"왜? 엄마 글이 어디가 어때서?"

"어디가 어떻지. 아주 많이 어떻지."


오리는 대실망이다. 행복회로를 돌리는 데에 있어서는 타고난 아이다. 엄마가 브런치에서 유명해지고 책이 나오고 엄청나게 잘 팔려서 그만 부자가 되고 마는 상상이 오리의 전문분야다. 수능공부를 시작한 때부터 아직 성적은 바닥인데 머릿속으로는 이미 미국에 석사 유학 가신 분이다. 브런치에 유명한 글들의 라이킷 수, 구독자 수가 세 자릿수 이상이라고 얘기해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엄마, 그럼 제목을 그럴싸하게 뽑아봐. 아니면 주제를 바꿔볼까?"

"응, 아니야~ 엄마는 그런 거 못해."


유명해지려면 밝은 글을 써야 한다는 것, 위로나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 쨍한 제목을 뽑아야 한다는 것쯤 나도 안다. 극복과 성장의 서사... 해피엔딩... 뭉클한 감동... 그런 스토리들은 매력적이다. 아마 오리의 행복회로에 부응하려면 그래야겠지. 그러나 J언니가 말했듯, 나는 "없는 이야기 만드는 거, 이쁘게 다듬는 거 못하는 애"다. 새로 옮겨간 부서의 업무가 힘들다고 했더니 언니는 단박에 그렇게 말했다.


행여 내 기억이 왜곡됐을지 몰라서 딸에게 팩트체크받고 글을 올리는 이 성격에, 내가 가지지 못한 밝고 아름다운 글을 지어내는 건 가능할 리 없다. 나의 모든 문제들은 뭉클한 해피엔딩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 모든 짐들을 이고지고 살아간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묻기(bury) 위해서다. 깔려 죽을 것같은 이 짐을 부려놓을 곳이 필요하다. 말을 하자니, 듣는 사람이 녹초가 될 거다. 어쩌면 끝내 글조차 쓰지 못할 이야기들도 있겠지. 마치 불운을 수집하는 사람처럼, 켜켜이 쌓여있는 내 컬렉션을 바닥까지 보고 말았던 누군가는 나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니가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이건 너랑 나랑 무덤까지 갖고 가야 돼."


불행은 사람을 밀어낸다. 자연스런 일이다. 가족도 감당해주지 않는다. 가족은 무슨 죄겠나. 딸도 굳이 나를 들들 볶다가 내가 지쳐서 겪은 일을 얘기해주면 "엄마는 무슨 양파야? 까도 까도 뭐가 나와." 하면서 짜증을 냈다. 죽지 않으려면 너무 무거운 이 짐들을 어딘가는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쓰는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했었다. 정서적인 피로도가 높았을 뿐더러 나는 그 화려한 곳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더라. 그래서 SNS는 전혀 하지 않는다. 하물며 내 속엣 것들을 인스타에 쓰겠나. 브런치에 속풀이를 하기 전에는 블로그에 꽁꽁 싸매고 썼다.  지금 그것을 드러내고 이곳에 글을 쓰는 것은 '한 사람'이 필요해서다. 굳이 내 컬렉션을 한 사람에게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나는 누군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표시가 필요했다. 이 글은 갑남이 읽고 저 글은 을녀가 읽더라도 내겐 그저 브런치가 '단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글을 쓴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을 더이상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라 굳이 내 글을 읽어달라는 투정을 할 필요도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이들에게 브런치를 소개하는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그러면서 나도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나의 글이 그들에게 닿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언젠가 오리가 내게 필명을 왜 '장완주'라고 지었는지 물었다. 뭐... 너무 긴 인생...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이미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목표는 끝까지 달리는 것뿐이라... 그렇게 얘기는 했지만 결국엔 그 이름 뒤에 숨은 것이다. 나의 이야기에 내 이름표를 솔직하게 붙이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만큼의 민망한 삶이고, 여전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같은 두려움이 가슴 저 깊은 곳에 아직 웅크리고 있으니. 지킬에게 하이드가 있듯 내게는 장완주가 있다.


이곳에 글을 쓰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많이 편안해졌다. 무거운 것들을 꽤 내려놓아서인지 현실의 나는 조금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털어놓아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은 줄어들었다. 쫓기는 느낌도 조금 덜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게 긴긴 이야기를 원없이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게다가 아줌마들의 대화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호흡이 빨라지는 예능토크가 된다. 숨이 가쁘다. 어디에선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살 것 같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자신이 글을 쓴 이유가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현실에서 하지 못한 말들, 일들을 소설에서나마 속시원히 하면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복수적 글쓰기는 그만의 생존방식이었다. 마음은 독을 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선생은 아름다운 글로 복수를 했으니 독은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재주가 없는 나는 여전히 매캐한 독성 연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는 것이라, 글을 쓰면서 민망하고 서글프고 그 '단 한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러면서 고맙기도 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앞질러 달려가고 혼자 남은 길에, 이를 악물고 뛰다가 멈춰서 숨을 고르는 그 길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박수, 여전히 내가 달리고 있음을 알아주는 그 사람. 당신 덕분에 나는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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