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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Nov 22. 2023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파

아기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젖을 물렸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산후조리원에 들어온 첫날이었다.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을 상상하던 내게 생각지도 않던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었다. 정확하게는 무언가에 단단히 물린 통증. 작은 아기의 입에서 나오는 힘은 예상보다 훨씬 셌다. 


“가슴이 너무 아픈데, 이래도 괜찮나요?”

“원래 처음에는 다 아파요. 발바닥도 아기 때는 부드럽다가 걸을 나이가 되면서 굳은살이 생기죠? 아기가 자꾸 물면 가슴에도 굳은살이 생겨요. 그럴 때까지는 계속 아플 거예요.”

가슴마사지를 해주던 조리원 실장이 말했다.

 

굳은살. 이후로 가슴이 아플 때마다 세 글자만 떠올렸다. 아기가 젖을 물 때면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 아기 잘했어. 너무 잘 먹네.”

입술을 깨문 채로 웃으며 말해주었다. 다행히도 날이 선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어쩌면 내가 통증에 익숙해진 걸지도. 


참기 힘든 통증이 다시 찾아온 건 수유를 한 지 한 달 반이 지나서였다. 살벌했던 시간을 견디고, 이제 얼추 젖 먹이는 엄마 태가 난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또 한 번 굳은살이 생기는 과정인가 보다’ 했다. 그러다 가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점은 하얀 색이었다. 처음엔 ‘가슴에도 뾰루지가 생기나’ 하고 넘겼다.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자, 검색을 해봤다. ‘가슴 하얀 점’만 검색했는데도 나와 같은 통증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유두백반. 다른 말로는 유구염이라고 했다. 유선이 막혀 젖이 고여 있는 거라고. 하얀 점의 정체는 고름이 아니라 고여 있는 젖이었다. 여러 차례 같은 증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치료법을 이야기해주었다. 소독한 바늘로 점이 생긴 부위를 콕 찌르면 묵은 젖이 한 번에 뿜어져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도저히 내 살을 내가 찌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 모유수유 매니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메시지 목록에서 그가 보냈던 문자를 찾아,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모유상담 받았던 산모인데, 기억하실까요? 제가 유두백반이 생겨서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턱대고 전화드렸어요.”

“나는 도와줄 수가 없어요. 규정상 상담은 두 번만 할 수 있게 돼 있어요.”

우리집 주소를 물어본 그가 근처의 모유수유센터 몇 곳을 소개해주었다. 모유수유센터는 다니던 산부인과 바로 옆, 지하철역 근처, 몇 번 들른 적 있는 보건소 골목에 있었다.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왜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그날 예약한 세 곳 중 한 곳의 센터에서 그 답을 찾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체인센터의 분점이었는데, 예약할 때 알려준 주소로 갔는데도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9층 전체가 산부인과인 그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9’라는 버튼 옆에 작게 붙어 있는 수유센터의 이름을 발견했다. 기다란 복도 끝까지 가면 나오는 작은 철문. 그 곳에도 수유센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유두백반 맞네. 다행히 심하지는 않네요. 제가 바늘로 길을 뚫을 거예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모유수유는 어때요?”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젖은 남는데 아기가 잘 안 먹으려고 해요. 처음엔 물고 잠들더니, 이제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젖을 가만히 물고만 있어요.”

“아기가 몇 개월 됐죠?”

“이제 50일 갓 넘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모유랑 분유를 같이 먹었고요.”

“그럼 분유맛에 완전히 익숙해졌겠네. 유두백반은 깊은 젖 물리기가 안 됐을 때 자주 와요. 그래서 깊은 젖 물리기를 늘 강조하는데, 산모님 상황에서는 아니에요. 아기가 그 정도 일수가 찼을 때는 깊게 물든 얕게 물든 물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거예요.”

“그럼 이대로 계속 젖을 물리나요? 증상이 재발하면요?”

“유두백반은 원래 한번 생기면 자꾸 생겨요. 다음에 생기면 저한테 오지 마시고, 아파도 계속 젖을 물리세요. 아기가 빨다 보면 막힌 데가 뚫려요.”


한 시간 정도 마사지와 치료를 받고 센터를 나왔다. 그래도 깊은 젖 물리기를 가르쳐달라는 내게 모유관리사는 설명해주었다. 

“아기가 여기 있죠? 네 손은 가슴 아래를 잡고, 엄지손은 아기가 무는 방향의 반대 방향을 잡으세요. 그런 다음 아랫 입술부터 윗입술까지 차례로 닿게 합니다.”

아기가 무는 방향이 뭔지, 그 반대 방향으로 잡는 건 어떤 건지 모르겠다고 하자 수유쿠션과 아기인형을 가져와 내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도 머릿속에 물음표를 백만개 띄운 표정을 짓자, 인형에게 젖 물리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었다. 

“집에 가서 이 사진이랑 비교하면서 물려보세요. 훨씬 덜 아플 거예요.”


집에 와서 아팠던 가슴을 들여다봤다. 하얀 점은 사라지고, 딱 그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때 생각났다. 오래 전 듣던 노래가사. 


구멍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넘쳐   


이 노래의 제목은 무려 <총 맞은 것처럼>. AI 스피커에게 부탁해, 노래를 틀었다. 가사 구석구석 내 이야기 아닌 게 없었다. 


총 맞은 것처럼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아픈데 
살 수가 있다는 게 이상해


조용히 노래를 따라불렀다. 원래는 절절한 이별노래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후로 가슴에 생긴 구멍이 메워질 때까지 틈만 나면 이 노래를 불렀다. 부르다 보면 웃음이 나고, 그러다 보면 조금씩 나아졌다. 노래 부르는 걸 잊었을 때 즈음 통증은 사라졌다. 


이맘때 내 움직임은 숙련된 댄서 같았다. 젖 물리고 분유 먹이고 트림 시키는 한 시간이 삼박자 왈츠를 추듯 부드럽게 흘러갔다. 아기를 잡은 손에는 긴장이 풀리고, 다른 쪽 가슴을 물리려 수유쿠션 위에서 아기를 빙그르르 돌릴 때면 아기와 나 둘만의 춤을 추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약속처럼 한 달 만에 통증은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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