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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Dec 13. 2023

나는 수유복을 입는다

일을 할 때 옷을 제대로 갖춰 입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다. 기능상의 이유도 있겠지만, 옷을 입으면서 일에 임하는 마음을 새로이 가다듬을 수 있다. 모유수유를 하는 나는 수유복을 입는다. 수유를 위해 옷을 따로 마련해야 할까? 그저 편한 실내복을 꺼내 입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수유복으로 기능하려면 꼭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아기가 배고파 할 때 신속하게 가슴을 열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는 것. 


제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펑퍼짐한 티셔츠다. 나 역시 집에 있는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제일 먼저 꺼내 입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고충이 있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면 쇄골 높이까지 티셔츠를 훌렁 들춰 올려야 한다는 것. 갈비뼈는 물론 상반신 구석구석으로 한기가 스며든다. 설상가상으로 티셔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쥐고 있어야 하니, 본업인 모유수유에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손은 아기의 뒷목, 다른 한 손은 젖 물리는 가슴을 잡고 수유해야 하는데 두 손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아기가 젖 먹다 몸을 버둥대거나 입에서 젖을 놓쳤을 때 바로 대처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모조리 탈락. 


그러다가 임부복으로 샀던 실내복을 기억해냈다. 상의에 단추가 달려 있었는데, 윗배까지 애매한 높이로 열고 닫을 수 있었다. 임산부에서 산모가 되어 다시 입어보니 웬 걸. 모유수유에 딱 알맞은 높이였다. 알고 보니 임부복 겸 수유복으로 만들어진 옷이었던 것. 으슬으슬 떨지 않고도 단추 몇 개만 열면 수유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때부터였다. ‘빠르게 열 수 있는가’가 옷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이 된 때가. 


의사에게 하얀 가운이, 군인에게 각 잡힌 제복이 있다면 내겐 수유복이 있다.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낸다. 넓은 옷장에서 매번 눈길이 머무는 곳은 오직 단 한 곳, 두 번째 서랍장 안의 바구니다. 바구니에는 네 벌의 옷이 들어 있다. 네 벌의 옷은 상하의 색깔이 같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상체와 하체가 구분되지 않은 한 덩어리로 보인다. 상하의 각각 다른 색으로 입어도 되지만, 무조건 세트로 입는다. 수트도 아래 위를 깔맞춤해야 포스가 살아나는 법이니까. 이를 닦고 아기 엉덩이를 씻기는 틈틈이 화장실 거울 속 나를 본다. 이젠 좀 수유부의 태가 나나 생각하면서. 


얼마 전,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어떤 사람을 마주쳤다. 몸에 딱 맞는 앞치마를 입고 양손에 박스를 든 그는 남다른 태를 가지고 있었다. 손에 익은 일을 자신있게 해내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고수의 실루엣. 육아의 세계에 막 들어선 초보지만, 나도 그런 태를 갖고 싶다. 그러니까 봐주는 이가 없어도 대충 입긴 싫다. 

최근에 고른 혁신적인 유니폼은 똑딱이가 달린 수유복. 젖 물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밥 달라며 보채는 아이를 수유쿠션에 눕혀놓으면 단추를 하나하나 여는 일도 조바심이 난다. 수유시간이 가까워 오면 중간에 있는 단추 몇 개는 아예 풀어두고 생활하기도 하는데, 똑딱이 단추 수유복을 입으면 그럴 일이 없다. 손으로 힘 줘서  당기면 맨위부터 아래까지 모든 똑딱이가 한 순간에 풀리는 마법! 부작용이 있다면 단추가 달린 수유복도 습관적으로 터프하게 뜯으려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 


네 벌의 옷 중 가장 아끼는 옷 중 가장 아끼는 옷은 핑크색 꽃무늬 파자마다. 바구니에 들어 있으면 제일 먼저 손이 덥석 간다. 수유복으로 만들어진 옷이 아니기에 가슴 높이가 아닌, 맨 아래까지 단추를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옷을 입으면 잠옷도 취향껏 골라 입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이제껏 내게 잠옷은 ‘늘어난 외출복’의 다른 말이었다.) 겨울로 접어든 지금 계절에는 터무니없이 춥지만, 친구가 생일선물로 사준 로브를 위에 툭 걸쳐 입고 신나게 거실을 거닌다. 영국드라마에서 방금 튀어 나온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TV 속 연예인들의 옷차림에 신기해하는 나를 발견하며, 유행이 반쯤 지난 옷으로 가득찬 옷장을 보며 씁쓸해하다가도 수유복을 입으면 금세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가지고 있는 수유복을 모두 빨아버린 어느 날, 집에 굴러다니는 검정 티셔츠를 대신 입은 적이 있었다. 수유를 할 때의 불편함보다도 크게 와닿았던 건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잘 마른 수유복을 갖춰 입고서야 수유부라는 정체성이 되살아났다. 이런 걸 거창한 말로 ‘직업의식’이라고 표현하는가 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와 있다는 감각. 수유복은 그걸 일깨워준다. 불평하거나 딴청피우지 않고 배고파하는 아기 곁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네 벌 중 한 벌. 이전에 비하면 너무나 간소화된 고민이지만, 매일 샤워 후 신중하게 옷장 앞에 선다. 바구니에 개어놓은 수유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오늘 기분에는 어떤 옷이 딱이려나?


최애 수유복과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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