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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Dec 28. 2023

라스트 댄스


누구의 삶에나 드라마는 있다. 자기 인생을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라마 아닌 것들을 잊고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드라마와 드라마 사이에 스쳐지나가는 광고처럼, 기억 나지 않는 평범한 날이 실제로 우리 삶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나도 생각했었다. 서서히 모유를 줄여가던 어느 날, 모유가 아니라면 먹지 않겠다 버티는 아이를 보며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렇게 극적인가’ 하고 수능을 망친 열아홉의 나까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길지 않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하나하나 짚어봤다. 그리고 다짐했었다. 다시 한번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보겠다고. 뒤늦게 젖을 늘려보겠다며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물을 2리터씩 들이켜면서 그려 왔던 결말은 이런 거였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싶었던 순간, 딱 그 순간부터였다. 유축한 젖병의 눈금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한 칸씩 몸집을 불려가던 젖은 어느 순간 작은 젖병 하나를 다 채울만큼 늘었고, 분유의 도움 없이도 아기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로 잠들었다. 나오지 않는 젖을 붙잡고 아기와 씨름한 지 꼭 네 달 만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고, 나는 현실을 산다. 드라마가 드라마일 수 있는 건 드라마가 되기엔 너무 심심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유만 먹겠다던 아기는 며칠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분유를 먹기 시작했다. 한숨 대신 꿀떡꿀떡 분유 넘기는 소리가 안방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든 모유를 먹이겠다는 의지도 점차 시들해졌다. 매일 아침 의지를 다지며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1리터짜리 텀블러는 슬그머니 싱크대 서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늘리는 건 그렇게 어렵더니, 줄이는 건 쉽네?”

냉장고 안에 유축해둔 젖병을 본 남편의 말이었다. 나에게 모유수유는 고요히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차 바퀴에 제동을 거는 일과 비슷했을지도. 요즘 많이들 받는다는 단유마사지 없이도 정해진 수순처럼 규칙적으로 젖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 전에 세게 한 번 제동을 걸어보기도 했다. 모유를 먹는다고 아기 몸무게가 더디게 느는 건 아니니 최대한 먹일 수 있을 때까지 먹여보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난 후였다. 매번 수유할 때마다 모유를 먹인 후 곧바로 분유를 주는 방식을 바꿨다. 하루 여섯 번의 수유 중 세 번은 모유, 세 번은 분유를 번갈아 먹였다. 


모유만 먹인 후, 아기는 다 먹은 후에도 아쉬운지 입을 쩝쩝, 혀를 낼름거리다 한 시간쯤 지나면 울음을 터뜨렸다. 배가 고프다는 신호였다. 백일이 지난 아기는 둥근 두 눈을 쉴 새 없이 좌우로 굴리며 집 안을 탐색했다. 힘이 생긴 두 다리를 하늘 향해 뻗고는 주변에 있는 건 뭐든 손으로 잡고 입 안으로 가져가기 바쁜 아기에게 엄마 젖은 턱없이 모자랐다. 배불리 먹이고 싶은 마음에 수유시간이면 분유제조기 앞으로 달려가는 날이 늘어났고, 줄어드는 모유 대신 늘어나는 분유를 먹으며 아기는 느리지만 조금씩 자랐다. 


모유수유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꼭 한 번은 자세히 쓰고 싶은 장면이 있었다. 아기와 나의 라스트 댄스. 하면 할수록 모유수유는 춤을 닮아갔다. 시간 맞춰 수유쿠션을 무릎 위에 올리고, 세 번 접은 수건을 수유쿠션 오른쪽에 얹은 다음 아기를 눕히는 첫 번째 동작. 수유복을 풀어 가슴을 꺼낸 후 오른쪽 가슴 아래를 받치는 두 번째 동작. 아기의 뒷목을 슬며시 잡아 가슴에 대는 세 번째 동작. 젖을 먹이는 중간중간 시계로 젖 먹인 시간을 재고, 10분이 지나면 수유쿠션 위의 아기를 빙그르르 돌려 왼쪽 가슴 앞으로 데려다놓는 동작까지. 모든 동작이 익숙한 음악에 맞춰 추는 춤처럼 리드미컬했다. 모유수유를 하는 마지막 날, 수유 준비부터 수유를 끝낸 후 아기를 안아 올려 트림시키는 것까지 모든 동작을 글에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마침내 오늘이 마지막인가 싶은 ‘그 날’이 왔고, 제법 비장하게 수유를 마쳤다. 


하지만 현실은 작위적인 마지막도 결코 허용하지 않는 법. 아기가 딸꾹질할 때 한 번, 밤잠 안 자고 보챌 때 또 한 번, 분유제조기에 식힌 물이 똑 떨어졌을 때 다시 한 번… 수시로 젖 먹일 일이 생겼다. 극적인 라스트 댄스 대신 잊을 만하면 추고, 추고, 또 추는 춤. 언제부턴가는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도 잊고 허겁지겁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사실은 너무 다행이다. 평소 지독하게 마지막을 무서워하는 나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든지 주고, 누구든 만난다. 모든 일과 사람이 그렇듯 내 모유수유도 마지막이 오겠지만  의미심장하게 글로 기록될 일도, 내 인생의 드라마로 기억될 일도 없을 것이다. 평생 못 보게 될지도 모르고 신나게 웃고 즐겼던 몇몇 사람들처럼,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서서히 지나가기를. 어느 순간 “어? 나 이제 젖 끊겼네?” 하고 알아채도 너무 뭉클해지거나 슬퍼지지는 않았으면. 


요즘은 하루에 한 번, 자기 전에만 젖을 짠다. 매일 눈금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보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힘주어 짜낸다. 짜낸 젖이 첫 번째 눈금에도 닿지 않고, 젖병 바닥만 간신히 채우다 마는 날도 오겠지?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달력처럼 곧 다가올 모유수유의 마지막을 가늠해보면서 혼자 쓸쓸해한다. 힘들긴 했어도 네 달간 참 좋았다며. 뭘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본 건 고3때 이후로 진짜 오랜만이라며. 


그래도 마냥 쓸쓸함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모유수유는 끝나도 수유는 계속되니까! 여전히 아기는 배고프고, 일어날 때도 놀 때도 재울 때도 깨워서도 나는 아기를 먹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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