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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26. 2022

나는 왜 이름에 목숨 거는가  

"에디터님, 저 책 나왔어요! 한 부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주소 보내주세요."


기쁜 마음에 주소를 보냈다.

일주일 후, 내가 기획한 콘텐츠가 책이 되어 나왔다.

하지만 책의 어느 곳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참 오랜 시간 기획자로 지내 왔다. 기획자란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다른 이를 빛나게 하는 직업이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기획 거리를 찾고, 알맞은 저자를 찾아 원고를 청탁한다. 1~2챕터 정도 원고를 받은 후, 저자와 만나 원고의 콘셉트와 방향을 다잡는다. 다음부터는 챕터별로 차례차례 원고가 도착한다. 도착한 원고를 꼼꼼히 읽고 피드백한다.


우리가 서점과 TV, 온라인에서 보는 콘텐츠들은 보통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한 인터뷰에서 나영석 PD는 방송기획자라는 직업을 두고 "평생 화분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기획자의 머릿속에는 매일 수많은 키워드가 돌아다닌다. 카페 옆테이블에서 주워 들은 말, 자주 보는 커뮤니티에서 조회수가 높은 글, 화제가 된 광고카피 등등. 그 키워드들은 기획자의 기획안, 저자의 원고를 거쳐 콘텐츠로 태어난다.


콘텐츠로 태어난 글을 보는 건, 기쁘다. 하지만 콘텐츠에서 기획자의 자리는 많지 않다. 책의 경우, 맨 뒷면의 판권페이지에 작게 이름이 들어간다. 새끼 손톱만 한 공간. 그 공간에 적힌 이름 세 글자에 기획자는 만족한다. 콘텐츠를 내 자식처럼 아끼게 된다.


그 손톱만 한 자리마저 허락되지 않는 경우, 절망한다.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한다. 온라인 콘텐츠 에디터로서 기획한 콘텐츠는 그 자리를 확보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온라인 콘텐츠가 책으로 만들어졌을 경우, 책의 판권에 다른 플랫폼 에디터의 이름을 넣기가 아무래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면몰수하고 저자들에게 카톡을 쓴다.


작가님, 출간 축하드려요!
함께 만든 콘텐츠가 책이 되다니. 저도 너무 좋아서 동네방네 자랑했어요.
그런데요 작가님, 혹시 작게나마 저의 이름을 넣어주실 수 있을까요?
판권에도 좋고, 감사의 말이라도 좋고, 각주라도 좋아요.


이런 부탁을 할 때는 정말이지 멋쩍다. 땅 끝으로 기어들어가 숨고 싶다. 하지만 여러 번 망설이면서도 말을 건넨다. 이름 세 글자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콘텐츠로 만들고 싶은 키워드가 있었다. 마침 함께 일하고 있던 저자 중 키워드와 맞을 것 같은 저자가 있어 집필을 제안했고, 인터뷰이를 모으고 고르며 콘텐츠를 만들어나갔다. 발행일정이 빡빡한 온라인 플랫폼 특성상, 매주 주말까지 오지 않는 원고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원고가 오면 어디서라도 꼼꼼히 노트북을 펼쳐 읽고, 피드백을 했다.


원고는 반응이 좋았다. 저자는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고 했다. 책으로 받아본 원고는 온라인 콘텐츠에 저자의 에피소드를 붙인 형태였다. 그런데 글 어디에도 나의 흔적은 없었다. 온라인 콘텐츠 프롤로그에 있던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라일락 에디터에게 기획을 제안받았다.  → 기획을 제안받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크게 바뀐 게 없지만 기획자에겐,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판권에도, 각주에도 나의 이름은 없었다. 책에 관한 인터뷰를 하나씩 찾아 읽었지만, 기획자에 관한 언급은 전무했다.


어쨌든 좋은 콘텐츠를 만들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위안 삼으려 했다. 그것도 안 되자, 최대한 그 콘텐츠를 피하려고 애썼다. 무방비 상태로 인스타를 하다가 책 표지를 맞닥뜨렸을 때는 심호흠을 하다가 머리를 감싸 쥐며 거실을 몇 바퀴나 빙빙 돌아야 했다. 가끔은 밤에 잠이 안 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잠자는 남편을 깨웠다.


"또 그거 봤구나."

감정형인 나와 달리, 이성적인 남편은 말했다.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건 없잖아. 그 에너지를 생산적인 데 쓰자! 지금 밀린 마감도 많은데 일단 그것부터 하고 차차 생각해보자."

과거에 갇힌 나와 달리, 미래지향적인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그만 생각하고,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면 돼. 어떻게 하면 기획자로서 네 자리를 지킬지, 그걸 고민해봐."


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오랜시간 기획자로 지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더 진짜 욕망에 집중해보는 건 어때? 일락 씨는 결국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써야 하는 사람 같아. 이번 기회를 내 진짜 욕망을 발견하게 해준 기회로 삼고 날려버리자."

남편 말도, 선배 말도 다 맞다. 그런데도 뭔가를 더 하고 싶었다.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날선 표현은 몇 차례나 다듬어 둥글게 만들었다. 그 다음, 작가에게 보냈다.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이번에 인터뷰 나온 거 잘 봤어요. 보면서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 동안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요.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 책이 너무 잘 나와서 반가웠어요.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어요.
제가 기획을 제안드렸고, 함께 만들어간 콘텐츠라고 생각했는데 저에 관한 언급이 모두 지워져 있어서요. 책이 재쇄될 때 작게나마 저의 이름을 언급해주실 수 있을까요? 각주라도 좋아요.
이미 한참 전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털어놓고 싶었어요.
저에게도 각별한 콘텐츠여서 콘텐츠가 잘되는 걸 진심으로 기뻐하고 싶었거든요.
하시는 일 늘 잘되시길 바라요.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나온 지 1년이 다 된 책에 뒤늦게 내 이름이 들어갈 리도 만무하고, 설사 들어간다 해도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지겠는가. 그래도 보내놓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졌다.

속이 시원해졌다고 브런치에 쓰면서 정말로 더 시원해졌다. 이제는 무심코 찾아간 동네책방에서 '그 책'의 표지를 발견해도 잠시나마 시선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독했던 X와의 관계를 끝낸 기분이랄까.


어젯밤, 남편에게 물었다.

"부인(둘이 있을 때는 남편을 부인이라고 부른다), 나는 왜 이렇게 이름에 목숨을 걸까? 내 이름이 엄청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데."

한참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남편이 말했다.

"명예욕?"

풋, 웃음이 터졌다.


남편 말대로 나는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다. 내 이름 세 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인정받고 싶다. 그것이 손톱만 한,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 자리라 하더라도. 그 자리를 가졌다는 것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살 수 있다.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작가님과 예비 작가님이 계시다면, 기획자에게도 약간의 자리를 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나서서 "제 이름 넣어주십시오" 하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먼저 말이라도 건네주시면 아마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할 겁니다. 엄마한테, 남편한테, 친구한테 자랑할 거예요. 손톱만 한 글씨로 적힌 이름 세 글자를 보여주면서요.

기획자에게 그만큼의 공간을 허락한다고 해도 작가님의 몫은 절대 줄지 않을 거예요. 기획은 기획자의 머리에서 나왔어도 그걸 글로 구현해낸 건 온전히 작가님임을 기획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서로 자리를 내어주고, 자기 자리만큼의 몫을 해내면서 재밌는 콘텐츠 많이많이 만들어요!

이상, 책 출간 후 1년을 끙끙대다 작가에게 카톡 메시지를 남기고도 마음이 괜찮아지지 않아 쓰는 반백수 기획자의 넋두리였습니다.


+)

저자에게 장문의 답장이 왔다. 원래는 내 이름이 들어간 원고였는데 출판사 편집 과정에서 플랫폼 이름도, 내 이름도 삭제됐다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획과정 이야기를 하는데, 매번 그 부분만 편집됐다고. 책에 어떤 식으로 내 이름이 들어갈 수 있을지 출판사와 이야기해보겠다는 답신이었다.

가끔은 정면돌파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괜찮아졌으니 밀린 마감을 해야지!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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