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일락 May 17. 2023

꽉 잡아, 친구!

사실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오랜만에 온 후배의 카톡. 일에 고민이 많다고 했다. 한참을 생각하다 답장을 보냈다.

“많이 고민해봐. 나와보니까 일 말고도 중요한 게 많더라!”


보내놓고 뜨끔했다. 그건 나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지난 달에 일을 맡겼던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 ‘내일은 연락이 오겠지’ 생각하기를 수차례. 결국 이번 달엔 연락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실감하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왜 연락이 안 올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머리는 자꾸 한 쪽으로만 돈다. 지난달에 낸 결과물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복기한다. ‘어떤 점이 부족했을까’ 생각하면서. 원고를 마감하고 메일을 보내면서도 속으로 꽤 만족했었는데. 갑자기 내 글이 못나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에라도 숨기고 싶다.


임신 초기, 무리해서 일하다 아이를 잃을 뻔한 이후 하던 일을 모두 놓아버렸다. 지금은 최소한의 일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일하자는 연락이 없는 건 슬프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날이 많아지는 것도 불안하다. 오전 열한 시, 모두가 일하러 나가고 텅 빈 아파트단지를 돌면서 혼자 쓸쓸해한다. 재택근무 시절, 일에 시달려 숨이 안 쉬어지면 뛰쳐나와 돌던 길을 이젠 하릴없이 배회한다. 해야 할 일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그때의 내가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명함이 없는 프리랜서는 일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쉬어서 좋겠다, 회사 안 다니면 뭐하냐는 질문을 늘상 받는다. 그래도 일로 바쁠 땐 카페에서 식탁에서 마감하는 일상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요즘은 그 마저도 머쓱하다. 차라리 스스로를 백수라 칭하는 게 마음 편하다.


출산 전까지는 아이 지키는 데만 전력을 다하자고 마음 먹어 보지만, 그러고 나면 내 존재가 온통 자궁으로만 점철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감정도 있고, 할 줄 아는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사실 요즘은 하고 싶은 게 별로 없긴 하다.)


다음주에 출산을 앞둔 친구는 수술 3일 전까지 출근을 한다고 한다. 출산하고도 한 달만 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에 나갈 거라고. 중간에 변수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친구의 닫힌 결말이 부럽다. 나는 뭘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까. 아이를 낳고도 이전처럼 이 일 저 일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결국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건가.


회사를 생각하면 거대한 도돌이표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다섯 번의 퇴사를 하고 나서 좋은 회사에 대한 환상은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회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화려한 복지, 열정으로 가득차 보이는 사람들의 사진에 설레지 않는다. ‘결국 회사가 회사지 뭐’라고 생각해버린다. 아무리 좋다한들 결국 회사일 그곳에 들어가서 깎이고 지쳐 나오는 나의 결말을 그린다. 또 다른 엔딩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작년부터 출산휴가에 들어가 몇 달 후 복직을 앞둔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회사에 가 있는 시간만큼 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데, 그 귀중한 시간을 아무 일에나 쏟고 싶지 않다고. 이젠 정말 의미 있는 일을 선택하고 싶다고. 어쩌면 친구는 아이의 첫 걸음마 소식을 어린이집 선생님을 통해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생에 다시 없을지 모를 기회와 맞바꿀 만한 일을 그는 찾고 있다. 그리고 나도 찾고 싶다.


오랜 시간이 지나 받은 후배의 답장에는 말 대신 두 개의 이모티콘이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웃는 이모티콘. 말로 표현하자면 감격 같은 건가. 사실 후배의 마음은 감격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뜬구름 잡는 듯한 내 말이 마음 깊이 이해되지 않아 둘러댄 답장일 테지. 역시, 진짜가 아닌 마음도 진심만큼이나 상대방에게 잘 전해진다. 눈치 빠른 그는 일보다 중요한 걸 깨닫기는커녕 일을 놓치고 중요한 게 뭔지를 전혀 모르게 돼버린 사람의 얼버무림이란 걸 알아챘을지도.


“다른 건 모르겠고, 일은 중요한 거더라. 웬만하면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있어!”

사실은 이 말을 했어야 했다.

이전 06화 나는 왜 이름에 목숨 거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