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유아교육진흥원에는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매일 200명 이상의 유치원생들이 물놀이를 하러 오는 바람에 우리는 풀장 물 채우기와 뒷정리, 아이들 옷 갈아입히기 등에 시간을 거의 다 쏟았다. 반면에 풀장을 개장하지 않는 금요일은 비교적 한가로웠다. 우리는 5개 층으로 나뉜 테마 학습장에 한명씩 배치 되어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을 맞았다. 아무리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8시간 동안 한 공간을 배회하면서 간혹 아이들이 어지르고 간 장난감 정리만 하다보면 정신적으로 지치기 마련이었다. 한 곳에 오래 앉아서 쉬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제 아주머니들이 다가와서 눈치를 주거나 질책을 하곤 했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힘들어 하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일하는 것보다 더 고역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남 선생님뿐인 것 같았다. 남 선생님은 나나 다른 동료들이 지친 표정으로 동물 전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우리를 불러서 그 앞에 앉혔다. 그리고는 우리가 그나마 관심 있어 하는 고슴도치나 거북이, 열대어들의 일일 섭취량을 알려주면서 먹이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런가하면 상영관 안에서 방영되는 영상을 궁금해하는 나와 동료에게 무료로 보고 오라고 권하신 적도 있었다. 유아들과 함께 착석하여 20분간 쥐라기 탐험 3D 영상을 보고 난 뒤에는 전에 없던 의욕이 생겨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영상 홍보를 가족들에게 하기도 했고, 유아들이 갖고 노는 공룡 모형의 이름도 자신 있게 알려주었다. 그러고나니 그날에는 마칠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물론 그런 작은 행동 변화는 현장의 어느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을만큼 사소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상 관람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근무시간에 영상 관람을 하고 오라는 쿨한 권유의 말 속에는 가능하면 일을 즐기면서 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남 선생님이 평소에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금요일에 유아가 100명 넘게 찾아온다고 해도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늘 한결같은 미소와 함께 놀이기구를 손수 작동하여 설명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시장 속 갖가지 동물들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면서 건강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을 지켜보면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 선생님은 말을 마친 뒤에 스스로 수긍하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남 선생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 일은 또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사담을 나누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랐지만, 어색하거나 낯설 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 선생님의 조심스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꼭 누가 맞고 안 맞고를 따지려는 건 아니지만, 남 선생님처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아끼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주변에 드물었다. 당시에 유아교육진흥원에서 우리들의 총 책임자였던 정규직 선생님들만 하더라도 초반에 호구조사하듯 나이와 대학 이름, 군필여부 등을 윗사람의 권리인양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타지 대학을 다니고, 눈 수술 때문에 입영 연기까지 받은 사연 많은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순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여서 29살 형도 나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우리 중 유일한 여자 동료도 언젠가 퇴근 시간에 마중나온 남자친구와 함께 꼭 붙어서 가는 걸 봤다는 정규직 선생님의 얘기에 언짢아 하는 기색이었다. 오직 남 선생님만이 오랫동안 우리의 신상에 무관심하다가 헤어질 때 몇 마디 물어봄으로서 유아교육진흥원의 부담스러운 상사들과 확실히 다른 분이시라는 인상을 주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만큼만, 헤어질 때는 서운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관심을 주려는 뜻을 갖고 계신 게 분명했다. 그건 남 선생님처럼 타인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배려인 것 같았다.
잠시 생각 끝에 나는 남 선생님의 관심에 응답하듯 진흥원에서 얼마나 일을 오래 하셨는지 앞으로도 쭉 계시는지 여쭤보았다.
"응, 나는 쭉 학원에서 일하다가 와서 아직 오년 밖에 안 됐어. 진흥원에서 허락해주면 나도 오래 다니고 싶지."
살짝 미소 짓는 남 선생님의 표정을 나는 잠시 말 없이 바라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오 년의 시간 동안, 어쩌면 그 이전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유아들과 아이들이 남 선생님의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오 년의 시간 동안 유아교육진흥원이 예전보다 발전 했다면 거기에는 겉으로 성과 내세우기에 치중한 많은 직원들의 공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준 남 선생님의 공이 컸을 거라는 생각을 지금도 종종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