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그해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에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졸업을 앞둔 마당에 공들여 쓴 소설은 신춘문예 심사 예심에도 오르지 못했다. 연초에 좋아했던 누나와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약속 당일에 거절 통보를 받았다. 힘들어도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 때문에 지역아동센터에서 국가 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여건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영하 10도 날씨에 센터 앞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몇 시간 동안 벌벌 떨며 지켜보는 일을 억지로 맡을 때마다 국가근로가 이렇게 빡센 건 말이 안 되는데, 라는 불평 가득한 생각만 들었다. 마냥 귀여운 줄 알았던 아이들은 학습 시간에 잡담하고 장난치고, 쓸데없이 자꾸 돌아다니고, 그만하라는 말은 듣지도 않고, 친구와 대놓고 욕하며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 때문에 짜증도 났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그런 행동은 그 나이대 또래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힘들 때라 더 못 견뎠던 것 같다. 이해하기는커녕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엇나가지 않도록 따끔하게 교육해야 한다고 합리화했다. 상벌점 제도를 다른 선생님들보다 적극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것은 아이들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교육 방법과 거리가 멀었다. 알고 보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힘이 덜 드는 방법이었다.
표면적으로 상벌점 제도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상점 시장 운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에게 그 이상의 영향을 주는 듯했다. 단순히 상점 시장에서 장난감이나 필기도구, 과자 등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 이상이었다. 어느 날 아침 독서 시간에 자꾸만 장난감 팽이를 꺼내 갖고 노는 2학년 아이게 벌점(벌점을 받으면 상점이 차감됨)을 줘야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 있었다. 그때 2학년 아이가 깜짝 놀라 말하는 걸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 벌점이 많으면 센터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한단 말이에요..."
"그럼 네가 행동을 똑바로 하면 되잖아. 잘하면 지워줄 테니까 남은 시간 동안 조용히 책 봐."
거실 벽면의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이름을 '벌점' 칸에 적고 '독서 시간에 딴짓'이라고 이유를 적었다. 본보기로 벌점을 주자 2학년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은 만만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책을 들여다보다가 내 눈치를 봤다가 했다. 어수선했던 아이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자리 이탈 없이 묵묵히 책을 잘 읽는 아이 세 명의 이름을 '상점' 칸에 적고 '독서 잘함'이라고 적었다. 이러면 상점을 받은 아이들이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다른 아이들도 앞으로 내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쟤들이 뭘 잘했다고 상점을 줘요."
"원래 그렇게 많이 주는 거 아니에요."
주제넘게 딴지를 거는 고학년 아이 두 명이 얄밉게 느껴졌다.
"독서 시간에 책만 똑바로 읽으면 되지 왜 남의 일까지 신경 쓰고 있어."
곧장 벌점 칸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이름을 적자 두 아이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학습 시간이나 놀이 시간에도 아이들에게 벌점을 주었다. 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게 되면서 일이 조금은 편해진 것을 체감했다. 놀이 시간에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로, 차가 다니는 대로변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찬바람을 맞으며 잡으러 다니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나만 보면 아이들이 알아서 조용해졌고, 축구와 캐치볼도 협소한 센터 앞마당에서만 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