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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코인 Jan 04. 2022

부품으로 살아도 좋은 한 가지 이유(1)

센터 아이들에게 잊혀져도 마음이 편한 이유

  (*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그 해 겨울에 일했던 G지역아동센터에 다시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센터 운영이 예전보다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기대는 고사하고 혹시라도 예전보다 등원하는 아이들 수가 줄어들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예나 지금이나 센터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많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G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크게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 판단에는 가뜩이나 좁은 거실에 스무 명도 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가득 들어 차 학습 해야만 하는 어수선한 학습 환경이나 아이들 급식에 귤이나 사과 같은 흔한 과일 하나 나오지 않아 조금 아쉬웠던 식단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1년에 한번 뿐인 일일캠프 때 내가 크게 활약한 기억도 부정적인 판단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지나고나서 돌아보면 그날 분리수거장에서 모아온 병두껑과 신문으로 병뚜껑 컬링과 접은 신문 위에 올라가기 게임을 진행하고 애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싸움을 한 덕분에 그날 아이들이 행복해 해서 덩달아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싸한 느낌도 들었다. 만약 그 자리에 유일하게 아이들과 유치하게 놀 수 있는 남자 선생님인 내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퍼붙는 눈 때문에 동물원과 아이스링크장 대신 영화관에 가서 실망한 아이들을 누가 즐겁게 해줄 수 있었겠는가 생각했던 것이다. 꼭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이 컸던 내가 없으면 안 되기라도 했던 것처럼. 내가 떠나고 나서는 아이들이 이전보다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찌보면 이제 센터에서 일하지 않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데다가 시혜적이기까지 한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찾아가기 전에 조금은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두 계절만에 찾아가는 터라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 쓸데 없는 마음으로 판명난 것은 그날 센터를 방문하고 나서였다.


  미안한 마음과 아이들에게 과일을 좀 사달라는 뜻을 암묵적으로 전하기 위해 문 앞에 있던 내 손에는 복숭아 봉지가 들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그날따라 음식 준비가 늦어진 모양인지 아이들이 여태 거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식판에 제철 과일인 수박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선물이 의미 없게 돼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실망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단물이 뚝뚝 흐르는 손을 마구 흔들며 인사했다. 5개월만의 만남이었음에도 예상 외로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는 아이는 없었다. 쿨하게 오랜만이라고, 어서 오라고 하거나 내 손을 잡으며 예전처럼 힘겨루기 장난을 하려고 했다.


  전 날에 내 전화를 받고 방문 시간을 알고 있었던 생활지도사는 남은 수박을 몇 조각 썰어서  대접해 주었다. 수박을 먹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 된 탓에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에 없던 디즈니 캐릭터 벽지가 도배 돼 있는 것을 보았다. 학부형 중 한 분이 재능기부로 도배해주셨다는 말을 생활지도사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는 게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봉사를 구실 삼아 온 것이었기 때문에 점심 이후에는 예전처럼 아이들의 학습지 문제 풀이를 도와주었다. 생활지도사는 예전에 나와 함께 학습할 때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세정이를 하필 내 옆에 붙여 주었다. 예전 기억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는데, 정작 세정이는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르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주변의 다른 여자 아이들과 공부 시간에 장난도 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많아진 것처럼 보였다. 세정이가 더 이상 외톨이로 지내지 않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서 딴짓하는 것을 많이 봐주었다.



  학습 시간 이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놀이방에서 보드 게임을 하고 운동장에서 피구를 했는데, 세정이 외에도 달라진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만 하더라도 또래 중에서 키가 제일 작아서 땅꼬마라고 놀림 받았던 동민이는 못 보던 사이에 키가 10cm 가량이나 자라 있었다. 체격이 커진만큼 마음도 의젓해진 것인지 다투는 동생들의 잘못을 적절하게 꾸짖으며 중간에서 잘 말릴 줄 알았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가오 좀 잡을 줄 아는구나, 라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동민이는 예전처럼 천진하게 웃으면서 내 명치를 쿡쿡 찌르는 귀여운 모습도 보여주었다.


  예전에 내가 있던 자리에서 발작하듯 삼십 분도 넘게 고함을 지른 적 있었던 승준이도 다행히 잘 지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여럿이서 피구를 할 때 벌어졌던 그 일은 단지 한 번의 헤프닝에 불과했던 모양인지 이제 아무 문제 없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친구가 공을 주지 않고 약올릴 때도 전처럼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어디서 전해 들은 영화 대사를 풍자하는 것처럼 '넌 내게 목욕값 (*모욕감) 주었어'라고 말했다. 누가 알려준 것인지 스스로 터득한 것인지는 몰라도 유머러스하게 받아 넘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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