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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코인 Jan 21. 2022

회장님을 석방시키기 싫다고 말할 자유(1)

노인일자리 어르신들이 강요 받는 탄원 서명 실태

  (*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회장을 가석방시키기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아오라는 임무가 주어진 건 A종합사회복지관에 채용 되고 세달 쯤 지나서였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 생소한 임무는 엄밀히 말하면 내 고유 업무는 아니었다. 원래 나는 복지관에 노인일자리 지원사업, 그러니까 노인들에게 임금 노동을 시켜주는 국가사업을 보조하는 전담인력으로 고용 되었다.



  '전담'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뭔가 제한적이면서도 예외적인 느낌에 걸맞게 정규직은 아니었다. 사실상 알바와 다름 없는 계약직이었기 때문에 하는 일도 단순 반복적인 일들이 많았다. 매일 5km씩 마을을 걸어다니면서 학교, 도서관, 시장, 하천 등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청소를 하시는 어르신들이 일을 잘 하시는지 지켜보고-사실상 감시하고- 복지관에 돌아와서는 어르신들이 날마다 일한 내역을 엑셀표에 기입했다. 그 외에 정기 감사 때 공무원에게 보여 주기 위한 형식적인 서류들이나 어르신들에게 나눠줄 활동 달력을 만드는 일들이 가끔 있었다.


  서류와 엑셀표를 마감해야 하는 월말에는 점심시간에도 일하고 야근도 해야할 정도로 바빴다. 반면에 월초에는 비교적 널널한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시간이 남아 돌거나 한 건 아니었다. 계약직들이 편한 꼴은 못 보는 정규직들의 업무 요청이 그 시기에 쏟아졌다. 리모델링이 예정된 별관에서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쇠로 된 건축 자재들을 관리직들과 함께 낑낑대며 옮기거나 복지관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마을 전역의 전봇대에 전단을 800장도 넘게 붙이는 등의 임무들을 군말 없이 해야만 했다.



  가석방 탄원서에 서명을 받아오라는 임무도 그런 식으로 떠맡겨진 일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이번에는 일을 맡긴 주체가 정규직들이 아닌 복지관 관장이라는 것이 전과 다른 점이었다. 관장의 입으로 직접 하달 된 임무를 나와 선임에게 전하는  60대의 여성 팀장은 그만큼 일의 사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관장님 명령이니까 이번에는 설렁설렁 하면 안 된다. 관장님이랑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더 도와드려야 한다."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는 내가 모니터링하는 200여명의 어르신들 대부분에게 서명을 받아오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팀장이 나눠 준 탄원서 내용을 살펴보고 있던 선임이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근데, 여기에는 회장님이 왜 구속 되었는지는 안 적혀 있네요."


  "나도 그건 못 물어 봤는데... 뭐 건설회사 운영하면서 건물 짓다가 여기 저기서 소송 들어오는거야 비일비재한 일 아니겠어? 요즘에 잘 되는 회사들 중에는 로비 같은 거 안 하고 정직하게만 운영 되는 회사도 잘 없으니까."


  선임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면 바쁜 와중에 짬 내서 싸인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머릿속으로 궁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때 가볍게 짐작하고 넘겼던 회장의 구속 사유가 문제로 불거진 것은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처음에 서명 받는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자신은 기관의 말을 대신 전하는 확성기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지나고나서 돌아보면 아마 왠지 모를 마음 속의 찜찜함을 덜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우선 오전에 스무명 정도로 구성된 하천팀이 모이는 하천의 굴다리 아래로 찾아간 나는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탄원서에 적힌 내용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리고는 시멘트 계단의 양 끝에 앉은 어르신들에게 탄원서를 각각 나눠 드리며 빈칸에 이름과 주소, 서명을 적어 넣으면 된다고 알려드렸다.


  뜻밖에 어르신들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구속된 회장이 여태껏 복지관 김장 행사나 체육 대회 때마다 주민 분들에게 후원을 해주신 분이라는 얘기를 반복하고, 일하는 어르신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팀장이 시켜서 왔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꺼냈음에도 서명을 거부하는 분들이 몇몇 있었다.  


  "내가 왜 범죄자를 위해서 사인을 해줘야 돼."


  모자 쓴 아버님은 주위의 어르신들이 계속 설득하는데도 극구 사양하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모자 아버님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버님은 적기 싫으신가요. 범죄를 저질렀다기보다는 사업을 하다가 일이 잘못 되셨을 수도 있잖아요...?"


  "감옥에 들어갔다는 건 나쁜 일을 했다는 거 아니여. 나는 안 해."


  모자 아버님은 검은 봉지와 집게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일터인 하천 산책로를 따라 걸어 가시는 모자 아버님을 쫓아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선글라스를 낀 아버님이 내게 다가오셨다. 손에는 탄원서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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