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딸이고 싶은데, 보호자가 되었다
코로나로 병원 면회가 금지되었다. 엄마는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왜 안 와?” “왜 여기 갇혀 있어야 해?” 반복되는 질문 속에는 서운함과 답답함이 뒤섞여 있었다. 주말마다 엄마를 찾아가던 나는 이제 병원 밖에서만 안부를 전할 수 있었고, 엄마는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자랐다. 보호자가 되는 날은 내가 부모가 되는 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평일에는 병원에 갈 수 없으니 필요한 물건은 쓱배송이나 택배로 보냈다. 어느 날, 엄마는 꽁치 조림을 먹고 싶다고 하시며 재료를 불러주셨다. 병원에서 어떻게 요리를 하냐고 말렸더니, 간병인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미 간병인은 엄마가 손도 많이 가고 까다롭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병원에 갈 때면 나는 죄인처럼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간병인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결국 간병인에게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시던 엄마가 병원 밥만 먹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꽁치 조림을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요리법을 검색해 반찬통에 담고, 병원 측을 통해 전달을 부탁했다. 엄마가 맛있게 드셨길 바랐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잘 먹었어. 고마워.”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돌아온 말은 “너 얼굴도 안 보고 가냐?”, “이런 감옥은 처음이다.”였다. 엄마는 분노와 외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지금 밖이 얼마나 위험한지, 회사도 재택근무를 병행하고 있고 모두가 조심하며 산다고. 하지만 엄마는 “차라리 코로나 걸려서 죽는 게 낫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성 들여 만든 꽁치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상처만 남겼다. 자식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다. 나 역시 그랬다. 여전히 엄마의 딸이고 싶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엄마는 혼자 방을 얻어 살겠다고 했다. 혼자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고 믿고 계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누군가의 손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었고, 휠체어도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 앞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해 자주 떨어뜨리셨고, 그럴 때마다 간병인과 간호사에게 꾸중을 듣곤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현실을 말했고, 엄마는 화를 냈다. 엄마는 답답했고, 나도 답답했다. 나라고 엄마를 더 좋은 환경에 모시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를 병원이라는 공간에 가둬두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만 하다가 63세에 쓰러진 엄마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100세 시대에, 너무 이른 병상이었다. 엄마에게 주말마다 외출은 유일한 낙이었고, 코로나는 그것마저 빼앗아갔다. 죄책감과 피로가 뒤섞이며 나도 점점 쇄약 해졌다.
그때 떠오른 생각. 결혼한 친구들은 누구의 엄마가 되며 자기 이름을 잃었다고, 싱글인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도 나를 잃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