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해도, 본능과 본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고,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내 안전과 이익을 지키려는 본능은 수천만 년 동안 우리 안에 자리 잡아온 생존 전략이다. 문제는, 이 본능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다. 타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가 가진 시선으로만 판단하고 해석하려 한다.
대부분의 갈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내가 익숙하게 살아온 방식, 나만의 해석 틀, 그리고 무의식 중에 반복되는 행동의 관성. 이것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 관계에 오해와 벽을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이기적인 존재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지닌 존재다. 그 마음의 시작에는 ‘공감’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남의 고통에 마음이 쓰이고,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이다. 우리가 '나 아닌 누군가'를 마치 나처럼 느끼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공감은 배워야만 생기는 능력이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타인의 상황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마음이 움직인다. 이 감정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되는 이타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남을 도울 때 단지 ‘좋은 일’을 했다는 도덕적 만족감뿐 아니라, 스스로도 따뜻해지는 감정을 느낀다. 감사 인사를 듣지 않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진다. 어쩌면 이타적인 행동은 ‘희생’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느끼게 해주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생태계에서도 이타적인 특성을 가진 집단이 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단지 자신만 챙기는 개체보다,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개체들이 집단의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타심은 집단을 위한 전략이자, 더 나아가 나 자신의 생존에도 도움이 되는 감정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이타심은 어쩌면 나를 위한 마음이 점점 바깥으로 번져나간 결과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오직 나 하나를 향했던 마음이, 시간이 흐르며 가족을 향하고, 친구와 이웃, 그리고 사회와 인류 전체로 자연스럽게 넓어진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 잘 되면, 나 역시 더 안전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돕는 일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타심은 정말 남을 위한 마음일까, 아니면 나를 위한 따뜻한 전략일까?
분명한 건,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 때, 그 손끝에는 나 자신을 향한 위로도 함께 담긴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도우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