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임투티 Sep 06. 2016

세가지 직업을 가진 서른살 여자

힘들지만 다 괜찮다.

섹스앤더시티의 캐리를 보면 참 멋진 여자라 생각했다. 어둑한 뉴욕의 낡고 멋진 아파트에서 연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여러 남자친구들과 뜨거운 사랑을 시작하고 마치고, 그리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는 여자. 커리어우먼은 누구든 괜히 그런 느낌이었다.


워커홀릭 : 정의를 살펴보면 가정이나 다른 것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 말 그대로 일중독자나 업무중독자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자주듣던 소리인데 왠지 칭찬이 아니라 갑자기 욕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을 하면 책임감이 몰려와 사생활이 없을정도로 몰두하긴 하는편인데 내게는 일보다는 가정과 사랑이 우선이라고 믿고있다. (물론 받는사람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나는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도대체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사는사람인가.

대체 왜이렇게 바쁘게 사는 걸까 하고 내 직업을 돌아보았다.



#1. 성공을 꿈꾸는 화려한 마케터

화려한 마케터라 하고 노동과 야근의 노예라 부른다. 여자 마케터들이 많아 다들 고상하게 일할 것 같지만, 남자가 많은 회사나 대기업이라면 모를까. 처음부터 나는 무거운 포스터며, 박스를 하도 날라 본의 아니게 어깨가 듬직해져버렸다. 6년차인 지금은 제발 남자 마케터를 뽑아달라 인사팀에 하소연하였고, 내가 남자를 굉장히 좋아하는 줄 알고 있다. 오해다. 에이씨. 뭐라생각하든말든 난 필요하다. 이러다간 정말 어깨가 어마무시해질것 같으니까.


어찌되었든, 나는 IT쪽 마케팅을 오래해왔다. 한마디로 광고쪽에선 얄미운 스크루지같은 갑의 인생으로 살았지만, 고객사 앞에선 의견없는 쭈구리 을로 살아가고 있다. IT세계도 참으로 세상이 좁아서 여기가면, 저기가면, 한다리만 건너도 다 알 지경으로 아주 좁은 세상을 자랑하고 있다. 가끔 히스테리적인 고집을 빼면 광고주로도 욕을 많이 먹어본다거나 고객사에 죽고 못살정도로 싫은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 또한 내 생각일지도)


주말동안 행사를 하느라 밤샘일을 많이 했는데, 오늘 인스타 해시태그를 찾는 중 인상 깊은 소비자의 글.


이런 아이디어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그냥. 이것은 나를 향한 최고의 칭찬. 인생 뿌듯한 순간이다. 이 맛에 밤샘 근무하나보다.

중요한건 나는 아이디어를 짧은 순간에 잘 내는 편은 아니고, 기획과 전략쪽이다보니 컨셉, 예산, 분석 등에 집중 하는 것을 창의적인 것보다는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피티를 진행하다보면 엄청 창의적인 실행 아이디어들을 말씀주시는 대행사에 일하시는 전문 분야 마케터들을 보면 존경을 표하곤 한다. 그리고 감사하다.


물론 나의 직업 중에 가장 피곤한 직업이다. 최고 바쁜 지금 시즌에는 거의 매일을 새벽 한시까지 일하고, 주말 근무도 필수일 정도로 정말 일만 하고 있을 정도이다. 광고주는 편히 일하잖아 라는 편견은 잠시 넣어두길 바란다. 전략을 오래 고민하는 광고주들도 있으니깐. 아무튼 그래도 앞으로 5년까진 더 버틸 수 있을 듯 하다. 재밌으니깐.




#2. 이제 막 신입사원이 된 꽃농부


세상에. 게을러도 이런 꽃농부가 없다.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인턴 주제에 결석이 더 많은게다. 선배들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게다가 일도 뜨문뜨문 배워 잘 하는지 못 하는지 구분이 안갈정도다. 그렇지만 농장은 조금 달랐다. 프로 농부들 - a.k.a 엄마와 이모 - 은 내가 농장에 나오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그저 "조사장님~ 왠일로 나오셨습니까~" 하는 구수한 놀림에 이내 머쓱해지고 만다.


신입사원이라 참으로 배울 것이 많다. 물을 주는 방법, 시기도 잘 모르겠고, 꽃이름은 더하다. 그래서인지 공부를 이곳에서 하려고 시작했는데 투잡인데다가 제 1의 직업이 바쁜 시즌이 와버리니 글쎄 농장이고 뭐고 눈만 붙으면 잠이 들 정도다. 그래서 목마른 내 다육 아가들 중 떠난 녀석들도 꽤 된다. 더 골치아픈일은 농장 자체를 제1의 직업으로 바라봐 혼선이 올때이다.


이 농장의 컨셉은 힐링이고요. 폰트는 어떤 폰트로 간판을.

인테리어는 인더스트리얼 컨셉이 좋겠고요. 예산은 이정도.

소비자의 불편을 감안해서 이것 추가. 경쟁사 대비 이것이 좋을 것.



뭐래니. 내가 적으면서 보니 어이없다. 프로 농부들은 얼마나 어이없을까. 농장은 농장일때가 예쁘긴 하다. 물론 더 예뻐지겠지만, 사실은 조금 투박해도 그 느낌자체가 농장의 컨셉인게다. 옆 농장에 나무 발로 쳐놓은 펜스도 참으로 예뻤고, 다른 논에 있는 버려진 컨테이너도 참으로 멋있어보인다. 본질인 꽃과 흙에 관심이 많아야하는데 삼천포로 빠져버린 신입이다. 그치만 마케터 인생으로 늘 급하게 살아왔고, 욕심있게 살아와서 이번엔 정말 천천히 laid back 하게 이지고잉하게 천천히 도전하기로 했다.


보기만 해도 예쁜 종류별 아이들. 글을 적으려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 정리를 못했다.



포장을 이리저리 딱 맞게 해보려는데 패키징 고민이 많은 걸 보면 제1의 직업과 제2의 직업에 큰 혼선이 오곤 한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가.




#3. 서른 살, 제법 멋진 딸

캐리처럼 멋진 방을 꿈꿔왔지만, 캐리나 나나 방이 더러운건 마찬가지. 아마 이 시대의 모든 딸들은 방이 더러울꺼라 나는 조심스레 위로받는다. 그리고 등짝 스매싱은 덤이다.


나는 늘 멋진 딸을 꿈꾸며 살아왔다. 다시 말해 효녀인데,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잘한다고 소문났다. (물론 엄빠는 인정하지않지만). 서른살이 넘고보니 엄빠가 더 소중하긴 하다. 가족이 생길 때가 오니 가족의 소중함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맛난걸 먹으면 엄빠가 생각나 꼭 사오곤 하는데, 효녀 심청이 코스프레 중이다. 아니면, 진짜 엄청난 효녀일지도 몰라.


나이가 들면 딸이 제일이라는데, 그래서 지금 조금 허세 부리고 있다. 자식들이 시집장가 가면 딸이 더 최고라는데 조만간 시집가고나면 어마무시한 딸내미가 되어있을 듯 하다.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며 "나한테 잘해" 라고 호통 치곤 한다. 물론, 시집을 아직 못가서 오빠가 아직까진 제일 따봉이다.


성격자체가 굉장히 남자답고 곰같아서, 여우짓이나 예쁜 딸내미같은 애교는 마이너스급이지만.

욕심 많은 딸내미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엄빠 심심하지말라고 매일같이 시트콤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서른 살, 나는 (제법) 멋진 딸이다.





세가지 직업 모두 나에게 소중하다.

어느 하나 이것이 더 중요해랄꺼 없이 모두 좋아하는 직업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본의아니게 아주 혼란스러운 서른살을 보내고 있다.


차분히 지나고 나면, 정리되겠지 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꿈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