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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임투티 Oct 09. 2016

새로운 시작을 위한 한보 뒷걸음

완연한 가을이다.

친구가 회사를 그만뒀다. 부도덕한 상사가 화가난다며. 이유는 즉슨, 여직원들을 막차로 부산으로 불러들였고, 잠은 탈의실에서 자라고 했다한다. 이틀뒤 겨우 잡아준 허름한 모텔에서 몇달일지 모르는 출장에 싸온 짐을 문앞에 내려둔 사진을 보내오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 사진을 보고나면 누구나 '수고했어 괜찮아. 넌 더 이보다 가치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 멋있게 그만둬'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녹취록까지 보여주었지만, 문제가 없다며 몰고 가는 이들에 질려 회사를 그만두었었다. 비전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를 다니길 좋아한다. 이보다 편한 회사는 없다라던지, 이 회사가 아니면 안된다라던지, 혹은 이 회사의 비전이 맞지만 너와는 동의한다 정도인지. 누구나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 나쁘다 옳다를 따지기보다는 그냥 '나와 맞지않는다' 가 더 좋은 듯 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로운 시작은 찾아온다.


서른을 넘기고 나니, '만약 내가 무모하게 그만두었는데 혹시 재취업이 안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불안감이 몰려오곤 했다. 당장 그만둔다고 패기있게 말했지만 얼마나 갈지 모르는 백수생활에 괜히 겁부터 먹게 되었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그 사람의 가치를 분명 인정해주고 있고, 그를 통해 생각보다 기회는  수월하게 오는듯 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인들도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있다. 그를 가치있게 여겨주지 않는 곳엔 비전도 없다. 

본인의 가치를 낮게 생각하지말자. 누구나 소중하다. 사람만이 아니다. 생명은, 모두 그렇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기간


콧물인줄 알고 스윽 닦은 것이 코피였다. 그정도로 바빴다. 직급에 어울리지 않을 직책을 달고 있어 책임과 부담이 제법 있다. 그래서인지 그냥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랜만에 농장을 찾았다. 모네의 정원. 잘 지냈니?

농장은 가을이 한창이었다.

벼가 여물었다던것이 엊그제인데, 시간이 빠르긴 하다. 벼가 익었다.

오동나무숲은 푸릇푸릇했는데 어느덧 낙엽이 지고 있다. 완연한 가을이다.

꽃밭이었던 봄, 그리고 야채밭이던 여름.

이제는 가을을 통해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부지런한 농장이다. 

물론 프로농부 엄마와 이모가 열심히다. 추위를 이겨내지 못할만한 아이들을 비닐하우스로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다. 여름에 보던 질기디 질긴 잡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간만이라서 들꽃으로 야생화꽃다발을 만들었다.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도 어느덧 색이 변해가고 있고, 국화와 해국이 그 자리를 매우기 시작했다. 민트 꽃은 여전히 향기로 빛을 내고 있다.


이모가 보여줄것이 있다며 따라오란다.

세상에. 목화다.

목화를 실제로 보니, 진짜 하얀 그냥 목화다. 목화솜.

어찌나 신기한지 재밌드랬다. 이렇게 터지면 수확을 해서 솜만 뽑아낸다고 한다. 이미 몇차례 수확을 거듭했고 나는 대로 계속 채워나간다고 한다. 나무가지를 뚝뚝 꺾어 꽃병에 넣으면 가을겨울에 어울리는 근사한 꽃꽂이가 완성된다고 한다. 

이모가 잔뜩 수확해놓은 목화솜. 

내가 관심을 가지며 감탄을 자아내니 엄마와 이모가 한마디 던진다.


시집가려고? 이불솜할거 아니면 얼쩡거리지마.



예예...알겠습니다요.

서른이 넘으니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프로농부 이모는 최근에 가드닝관련 페어도 참석했고, 블로그를 통한 인연들과는 정모도 했다고 한다. 농부들이 한참 어려졌다며 너도 '젊은 농부' 측엔 끼겠다며 얘기한다. 엄마나 이모는 '수국'은 '수국'일뿐인데, 젊은 농부들을 만나보니 풀네임을 전부 상세하게 외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다섯글자쯤 되는 수국이었어.


나도 모르니 뭐 의견을 주기조차 어려웠지만, 웃을줄은 알아서 '무슥하긴' 하면서 이 기회를 틈타 놀렸다. 농장 공사한다더니 주말에도 안나오냐 한소리를 들은 후라서 놀릴 수 있을 때를 틈타 재빨리 놀려버렸다. 


주머니가 너무너무 귀여운거라.


색깔도 우리 학교 색깔이라 왠지 마음에 드는 보라색.

다섯살로 돌아간 기분일지도 모른다. 농장에서 와서 오늘만 '이 꽃은 뭐야'만 백번은 말해본듯 하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도라지 꽃. 충격.

도라지 꽃이 이렇게 예쁜 줄 알았으면 더 맛있게 먹어줄텐데. 가뜩이나 좋아하던 도라지인데 더 좋아해야겠다.

여전히 예쁘다. 겨울을 나기 위해 허브들이 옹기종기 다 들어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벤더도 겨울을 이기지 못할까봐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와있다. 

천일홍. 요즘 플로리스트들이 참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 중 하나.

드라이플라워를 하면 그렇게 예쁘다고 하는데 이제 씨받을때가 되었다고 한다. 이모는 늙었다고 표현했다.


올해는 워낙 조금 키웠지만 이번에 씨를 받고나면 내년에 풍성해질 수 있다고 한다.

보기만 해도 향기롭다.

날이 추워지면서 꽃은 이미 없고 잎만 남아있다. 간혹 라벤더는 겨울도 잘 난다고 하는데 올해 다 죽을까봐 걱정돼 우선은 비닐하우스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올해 잘 버티고 나면 내년엔 바깥에서도 겨울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게 프로농부들의 의견. 내년 봄즈음 꽃을 잘 말려서 라벤더 오일을 직접 짜볼 계획이다.


루비목걸이. 행잉플랜트로 참으로 예쁘고 좋은 다육이인데 세상에. 꽃이 피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보라색 초록색에 촌스러운 노란색까지 더해져 참으로 예뻐보였다.


너 꽃이 피는녀석이었어? 

뭔가 잘 몰랐던게 웃겨서 깔깔 웃었다. 이모가 복수했다. 


무슥하긴


유칼립투스.

꽃꽂이로도 참으로 예쁘고 꽃다발에도 예쁜 녀석이다. 지난 여름 데려왔는데 농장에서 자란 녀석이 집 정원에서 자란 녀석보다 훨씬 빠르고 크게 자라났다. 이모는 드라이플라워를 해볼꺼라고 한다.


회사에서 행사를 하고 폐기처분한다는 테이블을 받아왔다. 

하얀색으로 깨끗해서 농장에서 쓰기 최고였지만, MDF라 엄청 무거워죽을뻔했다. 막상 놓고나니 햇빛 가리개로 딱 맞춤형이라 해가 잘 들지 않아 자리를 다 바꿔주었다. 뭐, 그냥 무거워죽을뻔했다. 다음부턴 무모하게 무턱대고 가져오진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완연한 가을이다. 벼가 익은 건너편 논을 바라보니, 가을다웠다.

근처 논에 공원 농사가 시작되었다. 진짜 나도 공사를 빨리 시작해야하는데, 회사일이 만만찮다. 투잡은 더 만만찮다. 잠들기전에 한시간씩은 이것저것 찾아보곤 하는데 뭔가 이렇다할 해결책이 쉽게 나오진 않는다. 화장실 설치는 이렇게 해야지, 비닐하우스는 이렇게 연동하고 하면서 생각해보다가도 하나로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 힘들다. 그렇다고, 이게 인테리어 디자이너한테 맡길 노릇도 아닌데다가, 맡길 비용도 만만찮아서 이거 뭐. 약간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이렇게 막혀버린 기분.

이모랑 꽈배기와 커피로 아침을 시작했다. 해를 쬐려고 비닐하우스 안쪽으로 오니 앉을자리가 마땅치않아 구루마에 자리잡고 앉아 커피타임을 한창 즐기는데 엄마가 성당에 다녀오다가 배를 잡고 웃으며 찍었다. 이것이 파머 스타일 커피타임. 공사에 대한 회의를 하는 우리 모습. 사각 회의실에 갇혀 아이디에이션하기보다는 차근히 차분히 하나씩, 그렇게 천천히 해나가기로 했다. 






가을이다. 날이 제법 쌀쌀하다.

농장에 가보니, 겨울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목화는 잔뜩 피기 시작했고, 오동나무는 앙상해지기 시작했다. 허브들은 꽃을 접기 시작했고, 국화는 바쁘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겨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금 매말라보여도 괜찮다. 겨울이 지나고나면, 또 봄이 올테니까. 한발짝 뒤로 가도 괜찮다. 새로운 시작은 늘 다가오기 마련이라서. 잠시 쉬어가고, 잠시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 생각하자. 그 준비로 인해 더 나은 새로운 시작이 있을테니까. 회사도, 농장일도, 연애도. 


아이들의 겨울나기 준비로 가을이 제법 분주하다. 

새시작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들을 응원한다. 

나 또한 조금 더 분주해지기로 결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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