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에 대한 대화
금요일 오후 6시 17분.
홀푸드 안에 있는 조그마한 바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아내와 나.
매주 금요일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었다.
아이들도 알고 있다. 금요일 저녁은 엄마 아빠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맥주는 늘 같다. 나는 IPA, 아내는 블론드 에일.
굳이 바꾸고 싶지 않다. 마치 오래된 재즈 스탠더드처럼,
익숙한 멜로디가 편안하다.
하지만 치킨윙은 조금 다르다.
한 주는 버팔로 소스, 또 한 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다른 소스.
물론 가끔은 잊고 연속으로 같은 걸 시키기도 한다.
그런 것도 우리다.
오늘은 아내가 들은 법륜스님의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쉽지 않지만 꼭 다뤄야 할 주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암 선고를 받고, 남은 시간이 1년 남짓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약속했다.
그 1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정해졌다.
바 안에서는 작은 소음들이 들렸다.
누군가 웃는 소리, 맥주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리.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중 한 친구가 병문안 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1년이 남았다고 선고받은 친구는 아직 살아 있다.
아내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치킨윙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직 뜨거웠다.
“죽음을 선고받은 친구를 더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친구를 더 슬퍼해야 할까?”
죽음은 그런 것이다.
'1년 남았다'는 것과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어쩌면, 후자가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에 안도하며 산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평소의 캘리포니아의 여름 해와 달리 오늘은 일찍 진다.
우리는 어떤 일에든 예측을 원한다.
내일 날씨, 주식 흐름, 집값 전망.
모두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유독 죽음만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인간의 위선일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빌 에반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이 뭔지 알아?”
나는 불쑥 물었다.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Some Other Time. 그런 제목의 곡이었어.”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DNR—연명치료 거부—로 이어졌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부담이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내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
누가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또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약한 존재일 뿐이다.
바텐더가 우리 테이블 근처에서 글라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 깨지는 소리.
바닥에는 투명한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깨진 글라스 조각처럼,
언제든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매일 그 글라스에 무언가를 담아 마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
오늘도 우리는 치킨윙을 나눠 먹고,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며
그 이야기를 조용히 마무리했다.
시계는 7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군가 차 시동을 걸고 있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겠지.
우리처럼.
-TK
PS -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로 부르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 어떤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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