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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웅 Dec 30. 2022

여행의 시작

2008년 9월 28일

파리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이 채 안 돼 제네바-코인트린Geneva-Cointrin 공항 활주로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자 모두 앞다퉈 안전벨트를 풀었고 승객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가방을 챙겨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말로만 듣던 국제도시 —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유엔UN: United Nations의 유럽본부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산하 기관의 본부들 그리고 적십자Red Cross와 국경없는의사회MSF: Médecins Sans Frontières 본부가 있는 도시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 감격도 잠시, 제네바 공항의 규모는 유난히 작아 보였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망했다. 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수화물이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 짐가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은 짐을 챙겨 떠났고, 컨베이어 벨트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홀로 돌고 있었다.


수하물 관리 사무실에서 분실신고를 하고는 뒤늦게 대합실로 나와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려왔다. 환한 미소의 거칠게 수염을 기르신 한 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네가 솔웅이구나. 스위스에 온 것을 환영해.” 먼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그것도 이렇게 빨리.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참가하는 프로그램의 한국인 스텝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생갈렌St. Gallen까지 스위스의 동서를 잇는 A1 고속도로를 시속 120킬로미터로 내달렸다. 내가 탄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글랑Gland 방면 출구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빛이 없는 언덕 위로 힘겹게 올라갔다. 뒤로는 제네바의 야경이 희미하게 보여왔다. 그리고 저 멀리 레만호Lac Léman 건너의 마을마다 밝힌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재 속 불씨처럼 아른거렸다.




나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스무 살이 되고 그렇게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 게 된 것이다. 마냥 상상 속의 나라라고만 생각했던 스위스, 나는 한치의 미래도 알지 못한 채 스위스라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여정, 결코 쉽지만은 않을 모험을 시작하게 된 것. 마치 촬영을 몇 분 앞두고 현장에서 새로운 시나리오가 손에 쥐어진 배우가 된 기분이랄까? 이제 즉흥 연기를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 나는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어쩌면 수천 년 전 신의 부름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났던 아브람Abram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익숙하고 편한 곳, 정든 친구와 가족이 있는 곳을 떠나 새로운 곳,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익숙하고 편한 곳을 떠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아브람이 정든 하란Haran을 떠나면서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게 된다. 그것도 그의 나이 일흔다섯에 말이다. 분명히 시작은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선 것에 우리는 환호하는지도 모르겠다. 미지와의 조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랄까?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고 평지가 나오자 그는 기어를 바꿔 다시 속력을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티니에 도착했다. 어두움이 깔린 이 작은 마을은 매우 고요했다.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데, 마을을 가로지르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수십여 채의 집들이 지붕을 맞댄 채 밀집해 있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이 마을에 대대로 터를 닦고 사는 사람들이란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건물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예전에 이곳은 고아원이었다는데 꽤 규모가 있어 보였다. 차에서 내려 리셉션으로 들어가자 내일부터 같이 수업을 듣는 여럿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악수를 청하며 짧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티모시예요.” 티모시는 어렸을 때부터 사용하던 나의 영어 이름이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위층에 있는 숙소로 올라갔다.


이층 침대와 나무 책상, 그 위의 램프 등 그리고 커다란 창문과 그 밑에 있는 라디에이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생소했다. 눈앞의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짐가방도 없었기에 갈아입을 옷도, 딱히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했지만, 시차증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흥분으로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나는 몸과 마음을 달래며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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