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8일
두텁게 내린 안개는 버티니Burtigny 마을을 단숨에 숨겨버렸다. 어제는 날도 춥고 해서 안에서 짐 정리를 했다. 다락에 올라가니 칠 년간 쌓아두었던 짐들이 커다란 나무상자 네 개에 나눠 담아져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먼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하게 했다.
오래된 물건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한 권의 책에는 150프랑과 50크로나가 들어있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그리고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운전면허증, 여러 장의 속도위반 딱지들, 미국 비자 서류와 친구들이 보내준 편지까지. 마치 보물 상자를 찾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스위스에 처음 왔을 때 쓰던 일기장이다.
오래된 일기장을 열자, 첫 장에는 요한복음 8장 29절의 글귀가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열정적인 내가 있었다. 과제 때문에 새벽 두세 시가 돼서야 침대에 누웠지만 매일 같이 끄적이던 일기. 처음에 한글로만 썼던 일기는 점차 영어와 섞이더니, 곧 영어로만 쓰여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배우고 싶었던지, 새로 알게 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림까지 그려 설명을 해두었다.
나의 일기장은 마치 내가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과 심정을 느끼게 해줬다. 부끄러워지고 화가 나고 또 감사하며 나를 웃게 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일기를 써왔고, 이는 나를 돌아보는 잣대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모험으로 가득한 지난날의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며 시간 여행을 해본다. 다시금 앞으로 한 걸음 내딛기 전의 나를 돌아보며 준비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