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으로는 부족했나

유방암 4년 + α 의 시작

by 티나

이번이 두 번째,

설마 설마 했던 일이 나에게 다시 찾아왔다.

익숙하기 싫은 전화가 떴고, 얼른 집어 도망치듯 교무실을 나온다.



“네, 환자분 지난주 검사 결과 전이로 보입니다. 다음주 다시 한번 내원하셔서 교수님과 이야기 나누시면 되겠습니다.”

맨날, 저 소리다.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해주면 좋으련만, ‘그렇게 보인다~ 그런 것 같다.’는 둥 하긴, 의료진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하며 또 애꿎은 활을 겨눴다가 접는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한다.

축 쳐져있을 여유 따위 없다.

4년전 처음 유방암을 선고 받았을 때도, 지금 전이판정을 받았을 때도, 가만히 앉아서 우울해할 여유가 없었다. 왜 이럴때만 이렇게 냉정해지는지.




이제까지도 해왔으니, 할 수 있겠지.

1년뒤에는 ‘중증환자’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1년에 한번정도 여유있게 서울을 가서 진료를 받는 느낌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너무 일찍 했을까?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하나씩 해결해야하고

매도 먼저 맞아야 낫다.

우선 가장 알리기 힘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한다.

남편, 친정엄마, 그리고 다른 가족들...



학교에 작은 교실 한 곳에서 통화를 끝내고, 꾹 참아왔던 인정의 눈물을 한방울 흘린 후,

현실을 마주하러간다.

교무실에 들어가서 내 자리에 앉는다.

학교 12년차, 사람들 보호 속에 살아야하는 조건을 다 갖고 있는 내가, 저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전쟁의 장수가 되었던 저 곳이 오늘따라 너무 밉다.




달력을 본다.

다음주 진료를 동그라미치며, 나란 사람은 주간계획을 확인하고 있다. 학교 일정과 수업에 가장 지장없게 만들기위해, 조율을 하기 시작한다. 아마 교무부장으로 일한 일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나’를 위해 사용한 유일한 권력남용이 아니었나싶다.

왜 나에게 '책임감'을 무기로 주었을까, 푸념 한번 던지고.



이제 다음 차례,

나의 상황을 보고해야하는 내 처지가 정말 싫지만, 아주 담백하게 이야기드리고 병원일정을 잡는다.

담백하게 이야기하는데, 꼭 아픈 곳을 건드린다. 아이셋은 어떻게 할거냐. 휴직을 하면 생활할 형편은 되냐.

그래, 안된다 어쩔래 그렇게 걱정되면 다 데리고가서 키우시던지 라는 마음의 소리는 말 잘듣는 교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100%가 아니더라도 당신들의 탓도 있어 라는 마음에 무조건 박차고 나가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안쓰럽게 걱정해준 것도 잠시, 이제 나의 후임을 고민해야한다.

던져두고 가버리고 싶고, ‘참나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해?’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엔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미안함과 미련함 그리고 책임감까지 더해진 바보콜라보였다.




자 일정은 잡혔고, 이제 누가 될지 모르는 나의 후임을 위한 인수인계작업에 들어간다.
성격이 참 급하다. 그런데 이런 성격이 이때는 참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하던 일 해왔던 일 그리고 점검해야하는 상황들을 나열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조금씩 알려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널리 알려야 빨리 낫는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그리고 나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겨 뼈를 갈아넣었던 1년반의 시간이 무색하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할 수 있어도 해줄 수 없었다. 참 초라했다. 그리고 그냥 속절없는 시간이 서럽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 병원에 가는 날,

언니가 함께 동행해주었다. 괜찮다고했지만, 와준 언니가 참 든든했다.

나에게 걱정가득한 눈을 하고는 있지만, 일상의 대화, 특히 아이들 이야기로 그 긴 대기 시간을 지나가게 해주었고, 교수님들께서 하시는 그 모든 말들을 함께 들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너무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암통합진료실,

“이번에는 암통합센터로 오세요.” 왜인지 매번 다니던 유방외과가 아닌 암통합진료실로 가야한다고한다.

여러과의 협진이 필요하단다.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닌데, 4개과의 교수님이 모여계신다.

누구의 입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건지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있는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다. 분명 듣고 보면 내 이야기인데 말이다. 뭐, 그런거 저런거 따질때가 아닌 것은 안다.

제발 최악은 피하자.



그때 들려오는 놀라운 한마디, “누가 환자예요?” 속없는 나는 저요! 하고 손을 번쩍든다. 바보가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한마디를 하신다. "걸어다녔어요? 그 다리로?" 여기까진 뭐 예상했다.

그래서 한마디 해줬다. 작년에는 더 아팠구요, 이번에도 마약진통제를 처방받고 조금 살만해진거예요. 하. 해도 너무 해맑았다. 아직도 내가 20대 첫 진단 받을 때라 착각하는것일까.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수술을 하셔야 할 수도 있어요.”

하...수술,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암치료가 시작되면 최소 1달정도는 아이들과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수술은 정말 재활까지 거의 6개월을 떨어져야 한다. 그것만은 바라지 않았다. 이와중에도 아이들과 나를 보살펴야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이건 미칠 노릇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아무리 바쁘고 아파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라는 자리를 이렇게 허무하게 내려놓을 수는 없는 거니까. 같이 있을 땐 떨어지고 싶고 떨어지면 보고 싶은 엄마의 국룰에 따라 수술을 피하는 방법은 없냐며 한없이 낮은 소리로 속삭여본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테지만...




그리고 멀쩡하게 들어갔던 다리가 아닌 갑자기 불편해진 마음이 얹어져 절뚝거리는 다리로 진료실을 나온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진출처 : 픽사베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