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친 새벽이었다.
동이 트는 새벽, 거실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고통이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 눈도 어깨도 심장마저도 무게감을 주었다.
46년 만에 처음으로 딸에게 폭력을 행사한 나는 숙취로 인해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 마냥,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새벽녘에 눈을 뜨니 갑자기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인왕산으로 향했다. 338.2m 높이의 낮은 산에 속하는 산이었지만 정상에 올라 청와대와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순간,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탁 트인 시계 덕분에 먹구름 같던 마음이 한결 맑아진 느낌이다. 기차바위 근처에 자리를 잡고는 숨에 주의를 두며 명상도 했다. 눈을 감고 숨의 들고 남을 느끼고 있는 찰나, 산바람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인생의 시름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듯 하산하는 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내려오는 길에 다짐했다.
‘그래! 마음이 복잡할 때면 종종 산에 오르자!’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식탁에 앉았다.
따뜻한 허브 차 한잔을 곁들이면서.
그 순간, 적막한 거실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다그치는 듯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랫감은 어떻게 할 거야?
쌓여 있는 삶의 빨랫감은 어떻게 할 거냐고.”
“뭘 어떻게 해. 지금 당장은 그 빨래는 안 할 거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산에 오르면 뭐 하냐? 명상을 수차례 하면 뭐 하냐고.
삶의 빨랫감은 저리 쌓여 있는데... 냄새나기 전에 빨아야지. “
“싫어! 지금은 싫다고!”
딸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스스로의 물음이었다.
내면에서 “명상을 수차례 하면 뭐 하냐? 삶의 빨랫감은 그대로 나 두고.”라는 물음은
잭 콘필드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명상지도자이자, 임상심리학자인 그가 쓴 ‘깨달음 이후 빨랫감’의 책 겉표지에 아래와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적 수행담은 깨달음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어떨까?
대각을 한 선사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존경받는 구루가 주차문제로 시비가 생긴다면 어떨까?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떨까?”
폭력을 행사했던 지난밤.
일주일 전, 대학을 안 가겠다고 선포한 고2 딸은 친구들과 놀다가 자정이 넘어서 들어왔다.
약속시간을 어긴 것도 화가 났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더 화가 났다.
(물론 내 관점에서 본 해석이겠지만.)
결국 온 힘을 다해 등 짝을 때리며 비극적인 말을 퍼부었다.
"네가 제정신이야!!!"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편도체가 활성화된 상태로 직진만 한 나.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한 아름 머리에 이고는 괴로운 마음을 스스로 토닥여 줄 생각에 다음날 아침, 산을 올랐던 거다. ‘마음속에 크게 느껴졌던 문제가 넓고 확 트인 자연 공간 속에서 생각을 반추하니 조금 가볍게 느껴지는구나.’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집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나도 삶의 변화는 없었다.
삶의 빨랫감은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니까. 간 밤에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엄마, 밥도 안 차려놓고 사라진 엄마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서로 인사 없이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딸 방을 멍하니 쳐다보는 날들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스무날이 지나도록 우리는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말없이 보냈으니까.
문득 자문해 본다.
‘산에 가는 것 좋지. 그런데 산만 갔다 온다면?’
‘예배드리러 가는 거 좋지. 얼마나 거룩해. 그런데 예배만 드리고 온다면?’
‘유튜브로 마음 돌봄 강의 듣는 것 얼마나 바람직해? 그런데 삶이 하나도 안 변한다면?
삶과 깨달음이 연결되지 않는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영적 깨달음만 가득 실어오면 뭐 하나? 일상의 빨랫감은 해결도 안 하고.‘
자책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잭 콘필드가 또다시 말을 걸어온다.
“영적 깨달음도 중요하지요.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지 않았습니까?
깨달음을 통한 평안함을 축하해 주시죠. 삶의 빨랫감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린 것 도요.
알아차렸으니 천천히 풀어봅시다. 깨달음을 통해 빨랫감을 해결하는 지혜가 찾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테니까요.”
내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책하는 마음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
깨달음의 에너지를 회복의 에너지로 삼아 삶의 빨랫감을 해결하고 싶었다.
빨래에서 쉰내가 나기 전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발현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고.
자식걱정뿐일까...
눈앞에 일, 돈, 관계, 건강, 자아실현 등 다양한 삶의 빨랫감들이 널려 있다.
어떤 영역이든 깨달음과 함께 삶의 빨랫감을 직면하는 용기가 시나브로 차올랐으면 좋겠다.
(숲 한가운데 새하얀 빨래가 널려있다. 마음의 치유와 함께 삶의 빨랫감도 해결한 것 같은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