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가게

몸, 마음,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에세이,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버스 추락 사고로 중환자실에 실려 온 아들, 현민.
긴 시간 의식불명 상태로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그를

지켜보던 부모는 중환자실 문이 열리자마자

의사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중환자는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의지가 생기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찾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 드라마 ‘조명가게’의 한 장면입니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문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호자가 의식의 유뮤에 따른 의지를 되묻자,

무릎을 탁 치게 되더군요.

'아! 그러네...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공기처럼 가볍게 쓰던 말이 순식간에 무게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더불어 누군가의 하소연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습관적으로 읊조리던 제 자신이 떠오르더군요.

‘결국엔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거지. 뭐…’라고요.


주변을 살펴보면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만

의식이 없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볼 때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상태'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멈춰버린 듯 사는 이들을

적잖이 목격합니다. (저도 이 문장에 자유롭지는 못하고요.)

살아있으나 사는 것 같지 않은 혼수상태 같은 삶이 존재하죠.






L씨는 어렸을 적 부터 엄마로부터 성차별을 받아왔습니다.

오빠와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늘 맛있는 반찬은 오빠 앞에 놓여졌죠.

맛있는 반찬을 오빠보다 먼저 먹으려다 엄마에게

손등을 세차게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늘 오빠생각뿐입니다.


어느 덧 구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허리수술 이후 5년간 누워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엄마를 자신이 모시게 되었죠.

과거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곱씹는 것도 괴롭지만

찾아오지도 않는 오빠를

늘 그리워만 하는 엄마가 밉기만 합니다.

억울함과 격노는 늘 그녀의 마음 속 안방에

턱하니 자리잡고는 삶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한달에 한번 쯤 막내 동생네가 와서

음식을 해주고 같이 먹으며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곤 했습니다.

분노와 신경질적 반응들에 지친 동생네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거지 뭐.

저런다고 엄마가 변하겠어?

형이 변하겠어?

저렇게 살면 자신만 손해지."


그러나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L씨는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누구를 용서할 마음도 돌볼 마음도...


그러나 누군가 직접적으로 L씨에게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말을 건낸다면

매우 폭력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다시 드라마 ‘조명가게’ 로 돌아가보죠.

'조명가게'는 사후세계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상징적 공간입니다.여기에는 각양각색의 조명이 켜져 있죠.



이 빛은 삶에서 놓쳤던 의미, 관계의 따뜻함,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비추는 상징입니다.

의식이 없는 사람, 혹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며 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죠.



사후세계에서 버시기사 오승원씨 (役 박혁권)는

정비소홀로 인한 사고로 죽어가는

학생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염까지 한 엄마는 조명을 사오는 것을 빌미로

딸을 조명가게로 인도해 죽어가는 빛을 살리려 하고

언니는 사랑하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등장하는 인물의 반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이들의 빛이 이승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그 빛을 놓치 않도록 돕습니다.


이 들 중 사후세계를 먼저 경험한 간호사,

영지(役 박보영)는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빛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도우며 독백조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합니다.


“어쩌면 의지는 혼자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의지가 생기죠? '라는 말에

화답하듯 말하는 이 대사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내 안의 고유한 빛이 힘을 잃어

도저히 스스로를 비출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조명이 되는 존재입니다.
서툴지만 꺼진 마음을 다시 켜는

여정을 함께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빛은 꺼져도 다시 붙일 수 있어.”

원영(役 주지훈)의 대사처럼 말이죠.







추석명절, 치매 노모를 모시고 있는

형님네서 돌아오는 길에

다짐했습니다.

'당신의 의지로 안된다면

우리가 함께 도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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