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실여행
멍- 흐릿했던 초점이 다시 또렷해졌다.
시선은 달력에서 멈췄다. 5월이었다. 할머니와 이별한 지 어느 새 6개월. 내가 감각하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흘렀다. 야속했다. 마음에 난 생채기가 아물었나 했는데, 일상을 어찌어찌 붙잡고 있나 했는데,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감각들이 얼마쯤 있다.
일을 했다. 열심히 했다. 무언가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3차원의 규칙을 잠시 잊었다. 이 세계에선 시간이 자꾸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가만, 다음주에 떠나야 하는 건가...?'
할머니가 상실의 여행을 선물하셨다. 미국 큰 아버지 집을 몇 번쯤 오가시며 쌓인 항공사 마일리지가 머지 않아 소멸된다는 걸, 종이나 글자로 남은 할머니의 흔적을 정리하던 중 알게 됐다. 항공사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개명해드리지 못한 할머니의 호적상 이름이 떠있었다. 그 옆에 나열된 숫자들. 머리가 얼른 돌아가지 않았다. 저 숫자가 현금으로 얼마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빨리 계산이 되지 않았다.
내 마일리지와 합산해 항공권을 예매했다. 설레고 들뜰 겨를은 없었다. 아린 감각이 가장 지배적이라. 대충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나라 중 한 달 이내로 왕복이 가능한 날짜를 눌러 항공권으로 교환했다. 분명 기억하지 못할 미래의 나를 위해 캘린더에 저장해뒀다. 그 기한이 돌아온 것이다.
상실여행이라 부르기엔 즐거웠다. 로마는 아름다웠다. 파리는 황홀했다. 파워J가 떠난 무계획 여행이었지만, 괜찮았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가면 됐다. 미술관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낯선 거리를 걷고 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사람 구경을 했다. 자고 싶은 만큼 잤다. 몇 번쯤 와본 도시에서 의무적으로 봐야 할 건 없었다. 게다가 다분히 뽑기처럼 오게 된 여행 아닌가. 일에만 몰두하던 근육과 신경이 하나씩 이완되는 것 같았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내 옆을 지나는 사람의 기척을 의식했다. 날씨를 챙기고 수중에 돈이 얼마쯤 남았는지 헤아렸다.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을 플래너에 빼곡히 적었다. 내일은 무얼할지 계획도 세웠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입맛도 살폈다. 갖고 싶은 게 없으니 잘 먹고 잘 자면 그걸로 됐다.
그러다 툭, 뺨을 타고 뭔가 흘렀다.
'아니, 뭐야. 지금 평온하고 차분한데 난데없이 왜?'
스스로의 감정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았다. 내 마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아야 했다.
여전히 내게 작용하는 감정처리 절차는 대략 이렇다.
OO를 보니 즐겁다/신기하다/재밌다/또 보고 싶다/시큰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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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에 얽힌 할머니와 함께 한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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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피식하고 웃으며 추억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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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잠겼다, 현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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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부재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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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종이에 베인 듯 아리다.
매일 눈을 뜨는 내 방, 옷을 입고 화장을 한 뒤 사회인 모드로 변신해 나서던 나의 집, 일정한 시간에 카드를 찍으며 타던 버스와 전철, '나는 로봇이다' 스스로 주문을 걸며 하루 9시간쯤 앉아 월급의 가치를 증명하던 회사. 이 모든 익숙한 공간과 시간표를 떠나자, 비로소 커다란 방 안에 혼자 웅크리고 얼굴을 파묻고 있는 어린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픔 앞에선 한 없이 작기만 한 내가.
빨리감기 혹은 자율주행모드로 살아 온 반년을 돌아봤다. 할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수 개월째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려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엄마는 몇 년 만에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할머니가 소천하시기 전 나와 다녀온 여행지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건, 엄마 나름의 메시지다. '딸아, 아직도 슬픔에 잠겨 있으면 어떻게 하니, 너의 사회관계망인데 바꿔야 하지 않겠니?'라고 채근하는 대신, 내가 주변의 변화를 하나, 둘씩 감지해내길 바라는 소리 없는 손짓이다. 할머니의 빈자리로 허기를 느끼는 내게 온기로 채워주기 위해 곁에서 불을 떼주며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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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제 슬픔의 기록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조금씩 일상의 궤도로 돌아와 1인분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들 보기엔 괜찮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건 내 자신이더라구요. 열심히 챗바퀴 돌리며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내 안을 가득 채운 감정을 헤아리고 나를 어떻게 대해주어야 할지 배워가는 일이 중요하네요. 그렇게,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씩 익혀나가는 요즘입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상실의 무게는 지금 얼마나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