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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Mar 11. 2024

Ep.16 할머니가 남기신 교훈들

① 용서, 혹은 미워하지 않는 마음


아버지가 미웠다. 할머니께 무심한 모습들,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들, 살갑지 못한 평소 모습들이 아쉬웠다. 사랑의 크기 만큼 미움은 부풀어 올랐다. ‘이 다음에 내가 크면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멋진 아버지상(像)’을 기대했던 만큼 실망은 끝이 없었다.


삶이 팍팍하면 다툼이 는다. 아무리 유복한 가정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날도 어머니, 아버지는 목청을 높여 다퉜다고 한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내 부모님도 막막한 생계 걱정 앞에선 서로를 향해 눈을 흘겼다. 싸움을 보다 못한 할머니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말렸다. “이거 놓으세요” 하고 할머니를 뿌리쳤다. 아버지의 힘은 과했다. 87세 노인은 저 멀리 내팽개쳐졌다.


“윽.. 어윽.. 아이고. 아이고.”

‘악소리’ 한 번 내지 못 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할머니는 너무 고통이 심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다. 약한 존재를 그렇게 대한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어머니다. 힘 조절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제력 없는 모습을 그 당시 몇 차례 목격했지만, 할머니를 그렇게 대한 모습은 평생 용서하기 어려웠다.


밤 9시쯤. 한창 법원의 인사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취재하던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곧 수술 들어가신다.”


당장 달려갔다. 할머니는 중앙보훈병원 응급실에 계셨다. 그곳엔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침상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병원비 걱정에 당장 수술할 수 있는 병원 응급실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할머니 손을 붙들고 위로해 드렸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시는데 일어나실 수도, 걸으실 수도 없었다. 피로에 전 젊은 의사를 붙들어 세웠다. 소변줄을 꼽아 달라고 부탁했다.


“옷장에 보면, 고모가 사준 그 코트 있지? 거기 안주머니에 모아둔 돈이 있어. 너 결혼하면 할머니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모았는데, 자꾸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겨서 다 써버리고 얼마 안 남았다. 그거라도 갖고 있다가 너 필요할 때 쓰려무나.”


“할머니, 왜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할머니가 수술 끝나고 직접 꺼내주면 되잖아.”


대기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진통제에 의지해 바스러진 고관절을 부여잡고 고통을 참아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버거웠다. 유공자인 할아버지 덕분에 그 배우자인 할머니의 수술비가 다른 병원에 비해 비교적 낮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수술을 맡게 될 의사는 수술 동의를 위한 상담에서 “단순히 뼈가 부러진 게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서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이 잘 된다 해도 고령인 환자가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위험을 알려줘야 했으니 그리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대로 두면 걷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오래 사실 수 없다”는 설명과 “내 어머니라면 수술을 택하겠다”는 의견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한 건 오후 10시. 수술은 다음날 새벽 6시로 잡혔다. 할머니 옆에 붙어 기도해 드리며 안심시켜드렸다. 할머니가 잠드신 뒤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가뜩이나 박봉인 신문사에, 그것도 소규모 전문지에 다니던 때라 비상금조차 모으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가정환경을 알면서 왜 나는 돈을 많이 버는 회사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나. 법대 3학년 때 연락 온 그 기업에 조기 입사했다면, 지금쯤 가장 빨리 수술할 수 있는 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실 여력이 있었을 텐데. 부모님이 돈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오늘의 다툼도 없었을 것이고, 할머니도 다치시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날 밤, 할머니의 서러움은 내 미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없어진 할머니는 한 주 전 아파트 현관 계단을 오르다 어지러워 넘어지셨던 터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이마에 생긴 상처에 손수 약을 발라주셨다. 그렇게 약한 할머니를, 어떻게 노인을, 넘치는 힘을 다 실어 밀칠 수 있을까. 할머니가 너무 아파 숨이 안 쉬어졌다는 그 순간에도, 내 부모는 악을 쓰며 싸웠다고 할머니는 회상하셨다. 할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당신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하셨다. “내가 벽에 고꾸라져서 20~30분쯤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둘이 죽어라고 싸우더라고.”


수술을 마치고도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한동안 나오지 못하셨다.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다 오전 6시 짧은 면회를 하고 출퇴근하기를 꼬박 2주.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병원을 찾았다. 회복하시면 모실 1인실을 빌려두었던가. 병원 보조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고 샤워를 하고 회사로 향했다. 면회 온 이들은 중환자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내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그동안 큰 병 없이 건강하신 건 정말 큰 복이야. 네 마음이 많이 힘들 거야. 힘을 내자.” 할머니가 끝내 깨어나시지 못할 경우 내가 받을 충격을 완화해 주려는 위로였지만, 버젓이 살아계신 할머니가 필시 돌아가실 것으로 전제한 그 위로에 나는 화가 났다. 그걸 삼키는 법을 그때 배웠다. 그들의 위로엔 악의가 없으니까.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겼으니까.


약간의 섬망 증상을 겪으셨지만 할머니는 회복하셨다.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다리에 탕탕- 사정 없이 망치질을 하더라’고 기억을 더듬으셨다. 소리를 질렀더니 마취가 잘 안 된 모양이라고 하면서도 계속 망치질을 하더라고 온몸을 떨며 두려웠던 순간을 전하셨다.



생기가 사라진 집, 낯설어진 익숙한 공간



약 3주 만에 집에 갔다. 집 안에는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가계가 어려워지며 언제라도 이사를 가야 할지 모르는 집안의 풍경보다 먼저 눈에 띈 건 베란다의 화분들. 할머니가 10년 넘게 기른 꽃과 식물들이 마르거나 검게 비틀어져 있었다. 매일 사랑의 말을 듣던 화분들이 싸우는 소리에 노출돼 저리 된 걸까. 할머니가 그동안 얼마나 사랑을 쏟으며 기른 화분들인데, 퇴원하셔서 저걸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하셨다. 수술 후유증으로 화분 걱정할 만한 기억력은커녕 인지력이 심각하게 떨어졌고, 무엇보다 혼자 힘으로는 걸으실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동네 요양원을 빠짐없이 다니셨다. 그중 가장 깨끗하고 냄새가 나지 않고 직원 수가 많은 대신 가장 비싼 곳을 골랐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비용이 모자라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할머니를 다치게 한 아버지였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어머니가 편찮아지시자 냄새가 나는 요양원에는 못 모시겠다고 했다. 시냇가에 무덤을 지은 청개구리 같았다.

 

그 후로 9년. 한 4년쯤 할머니는 걷기 훈련을 통해 워커에 의지해 혼자 화장실에 가실 만큼 회복하셨고 다른 5년 쯤은 휠체어를 혼자 끌고 다니실 만큼 장애에 익숙해지셨다. 생기가 사라진 집 대신 나는 요양원으로 곧장 향하곤 했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은 공간, 내가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또 받을 수 없는 그 공간이 내겐 낯설기만 했다. 할머니의 요양원 라이프가 시작된 이후 가슴이 철렁하는 일은 숱하게 있었다. 자신이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새벽녘 자꾸만 혼자 침대를 내려오시려고 하다 그만 주저앉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특유의 귀여움을 발휘해 그곳에서도 인기를 누리며 지내셨다.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셨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하셨다.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없는 이상 집에서 낙상 사고로 돌아가시는 일, 고관절 수술을 한 노인들이 겪는 흔한 레퍼토리였다. 돌아올 일이 요원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은 할머니 침대를 그대로 두셨다. 내가 독립한 뒤로는 할머니 짐을 내 방으로 옮기며 “어머니방 없앤 것 아니니 속상해하지 마시라”고 타일렀다. 할머니는 내게 자주 그 이야기를 꺼내셨다. “니 엄마가 내 방 안 없앴대” 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회복을 내다본 소망이나 되는 듯이.



미움의 시간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미움의 시간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할머니께 쏠린 내 사랑의 기저엔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물 위의 기름처럼 둥둥 떠 사랑과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넘어지신 그날, 내 가슴엔 미움의 씨앗이 뿌리내렸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수술을 대기하며 응급실 앞 침대에서 할머니가 내게 보이신 눈물이 떠올랐다. 미움의 싹은 우리집 베란다의 몬스테라보다 더 빠르게 싹을 틔웠고 무성한 잎을 냈다. 30여 년 중 20년쯤 유복했던 우리 집은 9년쯤 삐걱거렸다. 내 친구들은 “너희 집이 아무리 투닥거려도 일반 가정의 유복한 상태와 마찬가지”라며 내 미움이 금세 지나갈 만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론 아무런 기색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먹으니 내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는 속사정을 털어놓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내가 아버지를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부모에게 할머니가 왜 다치셨는지 내가 아노라고 입을 뗀 적이 없다. 무성한 잎을 낸 미움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만 울창한 숲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삼키고, 또 삼켰다. 그러면서도 모질지는 못해서 내 부모에게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했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드렸다. 미움이라는 벌레에 갉아먹힌 건 내 마음뿐이다.



할머니가 남기신 교훈



할머니께서 소천하신 지 70여 일. 나는 아버지 미워하기를 포기했다. 할머니의 빈자리를 수용하고 나니 이제 남은 이들이 보인다. 늙고 연약해진 내 부모 말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빚은 작은 말썽(?)을 처리하다가, 아, 이젠 정말 가족들 뒤치다꺼리일랑 그만하고 내 삶만 살고 싶다, 고 한탄하다가, 문득 그가 가여웠다. 아버지가 피터팬처럼 철없다고만 여겼는데, 내가 늘 내 부모의 보호자라고만 믿었는데, 어느 순간 내 부모가 말없이 채워 온 여러 공백이 보였다.


내 부모는 할머니를 30여 년 간 모셨다. 아버지는 장남이 아닌 데도 왜 자신이 부양의 의무를 져야 하냐고 불평한 적이 없다. 사실상 할머니를 모신 건 내 어머니다. 어릴 적 자신의 어머니를 여읜 내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부딪히곤 하셨다. 그러나 이후로는 할머니의 손맛과 대인관계 기술, 친척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정 많은 모습들을 높이 평가하시며 어떻게든 배우려고 하셨다. 기준이 높은 할머니 역시 어머니의 엉성한 습관이나 뚝딱이는 성향(요즘 표현으론 MBTI 중 T성향)을 못마땅해하길 10여 년. 그 이후로는 “네 엄마는 원래 그렇게 생겼어. 그렇게 이해해줘야 해” 하고 받아들이셨다. 눈을 감기 전날 밤 할머니는 엄마를 애타게 찾으셨고 산소호흡기 안으로 “고맙다, 고맙다” 하고 입을 뻥긋하셨다. 엄마는 할머니 귀에 대고 “어머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OO이, OO이 이쁘게 키워주셔서 고마워요.”하고 흐느꼈다.  


“우리 만큼 할머니 모시는 가정 없다”는 아버지의 자화자찬이 듣기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럴 수 있는가, 자문해 보았다. 지랄 맞아서 문제지, 착하기는 효녀 심청 저리 가라인 나는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도 내 부모와 같은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할머니 유품 상자에서 꺼낸 수첩에는 구불구불한 글씨로 “아들아, 엄마가 미안하다”고 적은 메모가 있었다. 입버릇처럼 “내가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며느리가 힘들어. 내가 빨리 가야 하는데” 하시던 할머니께서 장남 역할을 한 아버지에게, 오랜 기간 자신을 모신 자식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신 것이다.


할머니를 모시는 자식의 도리뿐 아니다. 내 부모는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대신 늘 어려운 이웃들을 살폈다. 명절에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쥐어드리면 아버지는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지곤 하셨다. 명절에도 문을 연 치킨집을 찾아 치킨 여러 마리를 사들고는 차를 몰고 혼자 사는 분들의 집을 찾았다. 때로는 그분들이 아버지를 자선사업가로 착각하고는 전화를 걸어 “오늘은 OO가 먹고 싶다”고 할 때면 나는 화가 치밀었다. 의로운 이의 가족은 고단한 법이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자신들이 그러기로 다짐한 까닭에 자식들이 고생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일찌감치 자생력을 얻었다. 할머니가 회복하신 뒤 나는 탄탄한 회사로 옮겼고 경제감각을 키웠다.


지난 주말 라디오 생방송을 마칠 즈음 내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며 부모님이 방송국 앞으로 오셨다. 함께 식사를 한 뒤 동생을 먼저 보내고 카페에 앉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할머니가 소천하신 뒤 아마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가만히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더 깊어졌고 얼굴에 기미와 점, 사마귀가 더 많아진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직장 생활을 안 해보신 아버지는 직장인들이 스타벅스 로고가 적힌 커다란 종이컵을 들고 사원증을 목에 건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그리도 멋있어 보이고 부럽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차장에서 조금 더 멀어지더라도 스타벅스로 향했다. 좁아진 어깨와 부쩍 마른 모습. 더 이상 미워할 에너지가 내겐 없었다. 내 부모 역시 언젠가 할머니의 뒤를 따라가실 멀지 않은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를 갉아먹던 그 벌레를 꾹 눌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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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제 슬픔의 기록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금요일 글을 발행하지 못했어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자정을 넘겼어요. 특별할 것 없는 제 글을 기다려 주시고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눌러 주시는 독자님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게 이 공간은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굴 같거든요. 독자님들의 반응은 위로의 손길 같고요.
만약 슬픔이라는 노래에 악보가 있다면 지금 제 노래는 긴 쉼표가 이어지는 구간 같아요. 모두가 퇴근한 텅빈 사무실. 혼자가 되자 눈물이 넘쳐 흘렀어요. 그러다 멈춘 사유의 자락에서 오늘 이 글은 시작되었어요. 거리낄 것 없는 자유로움, 주변으로부터의 망각이 제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 보게 만들어 줍니다. 상처가 치유 되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로할 힘이 생긴다고 했던 어느 현자의 말처럼 이 글도 누군가에게 다독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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