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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Mar 04. 2024

Ep.14 애틋하고 눈물겨운, 내 영혼의 양약

쌈짓돈, 검은 바다, 총명탕


고3 때 공부하다 집중력이 떨어질 때면 같은 반 친구들은 총명탕을 꺼내 마셨다. 총명탕이라니, 나는 그것이 네이밍의 승리라 믿는다. 시험이란 학생이 머리에 차곡차곡 저장한 내용을 시험지 위에 꺼내보는 과정인데, 입에 쓴 보약을 몇 모금 삼킨다고 얼마나 더 집중이 잘 될는지, 한 문제라도 더 맞힐 수 있을는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그 무용한 미신이 그때는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저걸 먹으면 나도 총명해질 것 같아!’ 하는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내 학업과 진로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부모님은 수험생인 딸에게 먼저 나서서 뭘 해주려 하지 않았고(지금에 와서야 내 부모님의 무관심은 미숙함이었음을 깨닫는다.), 내 꿈을 들어주고 길을 찾아주는 대신 “그건 돈이 많이 든다”며 더는 들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맏이가 아닌 자신들을 투영한 동생에게는 첫째가 겪은 실패를 타산지석 삼아 더 나은 대우를 해줄 뿐이었다. 내게 총명탕은, 내 부모가 주지 못한 응원과 사랑의 대명사였다. 미어지는 속을 할머니께 풀어놓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할머니는 “네가 아직 어려서 부모 마음을 몰라서 오해하는 것”이라고 타이르시면서도 내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셨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한 며칠 뒤 늦은 밤. 현관문을 열기도 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에 진한 약재 냄새가 자욱했다. 할머니는 경동시장에 나가 총명탕 약재를 사 오셨다고 했다. 달여서 받아도 되지만, 당신께서 손수 달여주고 싶다고 하셨단다.


다음날 아침, 나는 소풍날 아침처럼 두근거려 일찍 깼다.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 쌈짓돈을 털어 넣고 10시간 넘게 달인 검은색 보약을 빨리 맛보고 싶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여전히 올려진 커다란 들통. 안에는 약재를 꽉 채워 넣어 불룩해진 헝겊천이 검은 바다 위에 둥실 떠있었다.


국그릇에 가득 담아주신 그걸 마시려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릇을 들어 올리자 쓴내가 확 올라왔지만 눈을 질끈 감고 뜨끈한 진액을 꿀꺽꿀꺽 마셨다. 할머니는 옆에서 사탕을 들고는 총명해지고 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렇게 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내 혈관으로 타고 들어가 온몸을 덥혔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알아주고, 굽이굽이 생긴 구김살까지 있는 그대로 공감해 주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불안하고 결핍이 많았던 내 영혼을 꽉 채워주는 안정감이었다.


그걸 먹고 내 성적은 올랐을까. 세상에 찌든 내 의심과 달리 총명탕은 효과가 있었다. 조용하다 못해 때로는 삭막한 고3 교실에 앉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씨름하고 있자면 불쑥 외로움이 구토처럼 치밀어 올랐다. 총명탕을 마신 그날부터는 그런 시큼함이 올라오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시는 할머니가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었고, 오래 앉아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연료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문제가 생겼다. 학급 친구들에게 ‘나도 오늘 아침에 할머니가 직접 달여주신 총명탕을 먹었노라’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자리에 앉아 2교시 수업을 듣는데 느닷없이 칠판이 빙글빙글 돌았다. 선생님께 뭐라 말하지도 못한 채 반사적으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검은색 액체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약이 너무 진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오늘 공부 잘 됐냐”고 눈을 반짝이며 온화하게 물으시는 할머니께 철없는 나는 “다 토해버렸다”고 말씀드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아니 왜!” 하고 목소리를 높이시더니 인상을 쓰고는 금방 울어버리셨다. “너한테 뭐가 안 맞는 모양이다.” 한참을 우시는데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야자까지 하고 온 터라 피곤했던 나는 말실수를 수습하기는커녕 잠을 청하기에 급급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룸메이트인 할머니가 옆에 안 계셨다. 굳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계신 할머니께 “할머니, 나 총명탕 줘!” 하고 외치자 할머니는 참고 있던 호흡을 뱉어내며 “이이잉” 하고 울어버리셨다. “다 버렸다”면서 “내 새끼한테 조금이라도 안 좋은 걸 주고 싶지 않다”는 말도 보태셨다. 그리고는 내게 사과하셨다. “이쁜 내 새끼, 좋은 거 먹여주고 싶어서 사다 끓였는데 할머니가 미안하다.” 아침부터 눈물바람이 되고야 말았다.


책상에 앉아 문제를 풀다가도 눈물이 쏟아졌다. 사랑하는 손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느릿한 몸을 이끌고 경동시장까지 나갔을 할머니가 그려졌다. 단골 한약방에 들어가 ‘우리 OO이 총명해지는 약 주시오’하고 외치며 약재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셨을 강 여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족스러운 장보기를 마치고 아까운 마음 없이 건넸을 휴지에 싼 쌈짓돈은 본래 가족들에게 제철음식을 사다 해먹이고 당신의 병원비로 쓰시려고 아껴 모은 몇 달 치 용돈이었을 거다.


묵직한 배낭을 둘러메고 경동시장 곳곳을 더 돌며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을 쑤어 주시려고 늙은 호박을 사서 머리에 이고 왔을 할머니의 미간은 접혀 주름졌겠지만, 그 사랑을 고스란히 건네받은 내가 행복해할 상상으로 입가엔 미소가 번졌을 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시며 거실에 누워 사지를 떨구는 모습에 엄마아빠의 쿠사리도 들으셔야 했을 거고, 그 대사는 보통 “세상에, 어머니는 힘이 장사요. 어떻게 나도 못 드는 이걸 다 들고 오셨소.” 하는 놀라움과 핀잔의 가운데쯤이다. 정성으로 달이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을 할머니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 모든 시간과 정성, 값어치를 망설임도 없이 개수대에 쏟아부을 때 할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약을 안 먹던 사람이 처음 먹거나 약을 너무 진하게 달이면 종종 그런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아깝게 버릴 필요까진 없었는데 싶다. 그럼에도 딱 1번 마신 진한 한약은 20년째 내 총기를 유지해주고 있다. 몇 번의 좌절이 있었지만 할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지치지 않고 도전했고 그 성취의 자리엔 걷기조차 힘든 할머니가 나와 계셨다.


시험날, 내 부모는 잊어도 할머니는 잊지 않고 기도하셨다. 기자가 된 뒤엔 섭외가 어려운 취재원을 만날 때 그의 마음을 열어달라고 기도해 주셨고 거기에 내 기도와 진심이 더해져 그들은 십중팔구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어떻게 아시고 시간을 꼭 맞춰 전화를 하셨다. “잘 됐지? 함미가 여태 기도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매사에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나의 스승이자 멘토, 보호자, 기도의 후원자, 영혼의 친구, 내 진한 핏줄.


내 사랑의 스승께서 전수해 주신 사랑의 표현법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을 들여다 봐주는 것. 함께 울어주는 것.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상대방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여기는 것, 아니 부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기뻐하는 그 마음. 말이 아닌 행동. 지체하지 않는 행동. 아낌없이 주는 것. 선물에 시간과 정성을 담아 전하는 것. 그 귀하디 귀한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와 돈의 혼합물조차 망설이지 않고 쏟아버리는 것. 베풀고도 미안해하는 것. 더 주지 못해 한스러운 것. 그리고 언제나 기도하는 것.


조건 없는 깊은 사랑을 받아본 경험,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신 넘치는 사랑은 내 영혼에 양약이 되어 내 가슴을 사랑의 기억으로 꽉 채워주었다. 그 사랑은 내 안에만 담겨있기에는 몹시도 커서, 할머니에게 다시 전해졌고 부모님과 동생, 친척들, 친구들, 그리고 이웃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추억의티백 #할머니 #손녀 #애도 #추모 #사별 #상실 #슬픔 #치유 #꿈 #일상 #총명탕


안녕하세요. 오늘도 저의 슬픔의 기록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김없이 하트 모양 옆에 떠오른 익숙한 이름을 보면 이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조용히 제 등을 토닥여주고 가신 것 같아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다시 아침이 힘드네요. 당분간 찻물을 늦게 끓이게 될 것 같아요. 이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고, 먼저 상실을 겪은 지인들이 말해주었어요.
이 글은 할머니가 떠나신 지 불과 3주가 채 되지 않은 1월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썼어요. 입맛은 없고 감정은 제어되지 않아 일상이 힘들던 때, 주차장에 내려가 캄캄한 차 안에서 목청을 높여 울었어요. 그러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한 조각씩 떠오르면 흐릿한 시야로 기억을 토해내듯 적었어요. 잊지 않기 위해서.
글을 다듬으려고 읽다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내 인생의 벗, 내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리고 싶어요. 한바탕 울고 나니 좀 낫네요. 고민거리가 생겼는데 할머니의 통찰이 너무도 간절하네요. 부디, 오늘 꿈에 할머니를 만나기를. 꿈에 출연하시기 어렵다면 목소리라도 들려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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