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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의 나무 Mar 02. 2024

Ep.13 할머니, 나 잘했지

잠에서 깨어나니 두 달이 흘러있었다

눈을 뜨니 오후였다. 13시간쯤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피리처럼 높은 소리를 내는 바람소리에 깼다. 데굴데굴 굴러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방문을 열고 터덜터덜, 소리를 따라 갔다. 복도와 연결된 다용도실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힘차게 문짝을 밀어내며 풀피리를 불고 있었다. 문을 힘껏 닫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방 안을 둘러봤다. 커다란 유품 상자 두 개. 어질러진 식탁. 그리고 달력.


‘두 달이 지났구나.’


밥을 차렸다. 이게 아침이자, 점심이자, 저녁까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손이 아주 커졌다. 어젯밤 어머니가 연락도 없이 집에 들러 놓고 가신 멸치볶음과 연근조림, 총각김치에 미역국까지 끓여 배불리 먹었다. 상을 차리며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둔 커다란 곶감이 녹아있었다. 할머니께 드리려고 사둔 것은 차마 먹지 못하고, 부모님이 주신 걸 내먹었다. 든든히 먹고 나니 힘이 났다. 휴일이면 할머니를 모시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나란히 앉아 아이패드 카메라를 켜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웃었다. 혼자 카페에 가려니 내키지 않았다. 집에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달력을 넘겼다.


그렇게 두어 달 동안 미뤘던 아침의 일과를 다시 시작했다. 앤더슨 쿠퍼의 ‘슬픔을 나누다(Sharing our grief)’의 어느 에피소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사가 상실을 겪은 뒤 겪는 여러 변화를 나열하는데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망가진 아침 루틴을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던 근래 내 패턴을 하나의 증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아침마다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린 뒤 출근하던 습관은 에너지가 없다는 핑계 뒤로 사라졌고, 바지런히 햇빛이 나는 방향으로 데려다주던 화분들에 간간히 물만 주었더니 아이들은 모두 축 쳐진 채 신음하고 있다. 할머니를 닮아 식물 하나는 잘 키웠는데…



벤슨 분의 In the stars 음반 사진




라이터에 불이 탁 하고 붙듯, 팅- 하고 뭔가 점화된 기분이 들었다. 설거지를 했다. 청소기도 돌렸다. 이불빨래 모드로 세탁기를 돌렸다. 쉰 김치를 꺼내 올리브유를 넣고 볶았다. 냉장고 반찬통에 빠진 라벨을 붙였다. 찬장을 정리했다. 다용도실 선반도 다 끄집어내 다시 정돈했다. 빨래를 널었다. 화분에 물을 줬다. 싱크대 하단을 그득 채운 주방용품 포장을 벗겨 용도별로 정리했다. 식탁을 점령하고 있던 할머니 병원 서류를 한 데 모았다.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그러다 ‘OOO어르신 돈 19만 2,000원’이라고 쓴 봉투를 보자 몸이 굳었다. 저 돈을 어디에 보관하면 좋을까. 어쩐지 그대로 남겨두어야 할 것만 같다. 할머니가 내게 맡기셨던 돈까지.


벤슨 분의 노래 In the stars를 좋아한다. 가사에 할머니를 향한 사랑이 절절이 묻어나는 그 노래를. 노래를 듣다가 이따금씩 걱정했다. 내 할머니가 먼 여행을 떠나신 뒤 나도 저렇게 신을 원망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내 가슴속 가장 소중한 부분을 내어준 분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가사의 모든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거다.


Sunday mornings were your favorite

당신은 일요일 아침을 가장 좋아했어요


I used to meet you down on Woods Creek road

나는 우드크릭가에서 당신을 만나곤 했지요


You did your hair up like you were famous

마치 유명인이라도 되는 듯 머리를 하셨어요


Even though it's only church where we were goin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뿐인데 말이에요


Now Sunday mornings I just sleep in

이제 일요일 아침이면 나는 잠을 자요


It's like I buried my faith with you

당신이 묻힐 때 내 믿음도 묻었나 봐요


screaming at a god I don't know if I believe in

신을 향해 울부짖어요, 내가 믿는지 나도 모르지만


Cause I don't know what else I can do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거든요.


I'm still holding on

나는 아직도 붙잡고 있어요


To everything that's dead and gone

죽고 사라진 모든 것들을


I don't wanna say goodbye

작별인사를 건네고 싶지 않아요


cause this one means forever

그건 영원한 이별을 뜻하니까요


Now you're in the stars

이제 당신은 별들과 함께 있죠


And six feet's never felt so far

무덤 속이 원래 이렇게 멀었나요


Here I am alone between the heavens and the embers

나는 여기, 천국과 타다 남은 불씨 사이에 혼자 있네요


Oh it hurts so hard

너무 아파요


For a million different reasons

그 이유는 백만 가지도 넘죠


You took the best of my heart

당신은 내 심장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가져갔고


And left the rest in pieces

나머지는 산산조각 나버렸어요


Digging through your old birthday letters

당신이 예전에 써준 생일 편지들을 뒤지고 있어요


A crumpled 20 still in the box

상자에는 아직도 구겨진 20달러 지폐가 있죠


I don't think that I could ever find a way to spend it

이 돈은 어디에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Even if it's the last 20 that I've got

내가 가진 마지막 돈이라고 하더라도요



그럼에도 털고 일어나려 애쓴다. 할머니가 세상 곳곳에 남기고 간 흔적들을 기억하면서. 내게 할머니가 그토록 애틋한 존재인 이유는, 할머니가 내게 준 사랑의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데다 내게 보여주신 사랑의 빈도가, 매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땅 위에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흘리면서 걷는다. 사라처럼 허쉬 초콜릿 뭉치를 흘리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사라가 타인에게 자신의 조각을 나누어줄 때, 실은 자신의 일부를 남긴 것이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 길들여지지 않는 슬픔에 대하여 중 -


다행히, 노랫말과 다르게 나는 상실의 아픔을 원망이 아닌 감사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이 순간 또한 은혜다.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라고 하신 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삶이 말 그대로 ‘받은 것’이며, 우리에게 삶을 준 분은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희로애락을 느끼며 인생 곳곳에 숨겨둔 보석을 발견하고 감탄하기를 바란다는 걸 함축하신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아직도 치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지만, 두어 달 치 집안일 중 3분의 1쯤을 너끈히 해치웠다. 이제 차차, 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현관 옆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둔 할머니 옷가지를 바라본다. 꽃분홍색 니트 목 뒤 라벨 아래 할머니의 본명이 하늘색 실로 정성스레 수놓아져 있다. 내 야무진 손과 생활방식을 늘 칭찬하셨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할머니, 나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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